현대로템의 '고속열차' 기술은 '반도체'·'5G'급 기술
산업부·국정원 등 범부처 참여 산업기술보호위 허가받아야
육군 주력전차 'K2 흑표' 만드는 방산업체로
방위사업법에 따른 산업부·방사청 허가도 필요
"지분 매각 부인 공시, 정부와 사전 협의 부족 때문일 듯"

현대차그룹의 방산자회사 현대로템 매각이 난관을 만났다. 현대로템은 매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철도사업이 3년째 적자를 지속하고 있고, 알짜 사업으로 분류되는 방산사업도 장기적인 성장 동력으로 평가받지 못하면서 지속적으로 매각설에 시달려왔다. 일단 현대차(005380)그룹은 21일 "현대로템(064350)지분 매각 등을 추진하고 있지 않다"며 매각설을 부인했다.

현대차그룹이 방산업체인 현대로템의 지분을 매각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허가 등 수많은 난관을 넘어야 한다. 현대로템은 대한민국 육군의 주력전차 K2 흑표, K1A2 등을 독점 생산하고 있다. 또 국가핵심기술인 고속열차 동력시스템 설계·제조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유일한 열차 제조사다. 결국 현대로템의 매각 문제는 수십년간 쌓아올린 핵심무기와 고속열차의 기술력을 포기하느냐에 대한 정책적 판단 문제라는 이야기다.

기동훈련 중인 K2 흑표 전차

◇대한민국 육군 주력전차 만드는 유일한 회사

22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에 따르면, 현대로템의 지난해 전체 매출 2조7853억원 가운데 철도부문 비중은 52.1%(1조4520억원), 방산부문은 29.5%(8225억원)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철도부문이 116억원 영업손실을 기록한 가운데, 방산부문은 796억원의 영업이익을 거뒀다.

무엇보다 현대로템은 국내 유일의 전차개발 및 생산업체다. 1980년대 이후 축적한 전차·장갑차 관련 기술력을 바탕으로 국내 시장 지배력을 유지하고 있다. 국내에는 이 분야의 경쟁사가 없다. 현대로템과 함께 지상무기 3사로 분류되는 한화디펜스·한화에어로스페이스(012450)는 현무·천마·K9 등의 발사체·자주포 등에 주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현대로템은 K2 흑표 전차를 지난해부터 양산하기 시작했고 터키·노르웨이·폴란드 등으로 수출도 추진중이다.

지멘스가 방산 분야를 안고 있는 상태로 현대로템의 지분 일부라도 인수하기 위해서는 산업부장관의 허가를 꼭 받아야 한다. 경영권이 넘어가는 주식 매매의 경우 방위사업청의 허가도 받아야 한다. 경영권이 넘어가는 주식 매매의 경우 산업부는 방사청의 보안측정 심의결과를 통보받은 뒤, 최종적으로 승인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지난 2015년 삼성과 한화 사이의 방산 부문 빅딜 때 공정거래위원회보다 산업부의 허가가 더 관심을 끌었던 것도 이러한 배경 때문이다. 경영권 변화 없이 지분 일부만 거래할 때도 방산업체는 외국인투자촉진법상 산업부 장관의 허가가 필요하다.

지멘스가 현대로템의 방산부문을 빼고 철도부문만 인수하려고 한다는 관측이 나온 것도 이같은 인허가 절차 때문이다. 방산 분야를 빼면 인허가 부담이 줄어서 매각 가능성 높아지기 때문이다 실제 지난 2018년 금호타이어는 중국 더블스타에 비방산 부문을, 국내 회사 흥아에 방산 부문을 분할 매각했다. 금호타이어가 만드는 전투기용 타이어가 문제가 되자 이같은 방식을 택한 것이다.

방위산업체 경영권 매매시 승인절차

◇35년간 수천억원 국비 들여 개발한 KTX-산천·이음 기술 보유

그러나 이 경우에도 산업부 허가가 필요하다. 현대로템이 고속철도열차 분야 국가핵심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회사이기 때문이다. 산업기술의 유출방지 및 보호에 관한 법률(산업기술보호법)에 따르면, 국가로부터 연구개발비를 지원받아 개발한 국가핵심기술을 보유하는 회사를 인수·합병하거나 합작투자 등 외국인투자를 하려면 미리 산업부 장관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산업부 장관은 해외인수·합병 등이 국가안보에 미치는 영향을 검토해 국가정보원,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국방부, 특허청 등 주요 부처와 협의한 후 범부처 차관급 등으로 구성된 산업기술보호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이를 승인할 수 있다.

산업부 고시는 ‘30나노 이하급 D램 등에 해당되는 설계·공정·소자 기술’이나 ‘5G시스템 설계기술’ 등 ‘국가핵심기술’ 71개를 지정하고 있는데, 이중에는 ‘속도 350km/h 이상 고속열차 동력시스템 설계 및 제조 기술’이 포함돼 있다. 속도 350km/h 이상 고속열차는 KTX-산천, KTX-이음 등 국내 주요 고속철도열차를 말한다. 프랑스 알스톰사(社) 기술을 적용한 1세대 KTX 고속열차 이후 기술 국산화로 현대로템이 생산하기 시작한 주요 고속열차가 대부분 해당된다는 이야기다.

산업부 관계자는 이와 관련 "국내에서 고속열차 동력시스템 설계·제조 기술을 보유한 회사는 현대로템 뿐"이라면서 "해외인수·합병을 위해서는 산업기술보호법에 따른 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부는 1996년 이후 25년 동안 매년 천문학적인 국비를 들여 고속열차 개발을 지원해왔다. KTX-산천으로 대표되는 한국형고속열차 개발에는 1996년부터 2007년까지 2600억원 가까운 국비가 투자됐다. 해무나 KTX-이음으로 발전한 430km/h급 차세대고속열차 개발에는 2007년부터 2015년까지 1100억원의 국비가 투자됐다. 이후에도 국토교통부 산하 국토교통과학기술진흥원은 각종 철도기술연구사업에 지난해 501억원, 2019년 780억원, 2018년 867억원, 2017년 978억원, 2016년 935억원을 지원했다.

또 현대로템은 2020년 한 해에만 GTX-A노선 전동차 160량, 서울시 9호선 전동차 48량을 수주했고, 향후 4차 국가철도망 구축계획에 따른 대규모 추가 투자도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 IB업계 "현대차 그룹 부인 공시, 정부와 사전 협의 부족 때문일 듯"

이 때문에 현대로템도 올해 사업보고서에서 "1990년대 중반까지 외국 기술에 의존하던 국내 철도기술은 철도연구기관을 중심으로 한 기술개발과 철도차량 완성차 업체 및 부품업체의 상생노력을 통해 빠르게 성장하여 글로벌 경쟁구도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썼다. 철도연구기관은 정부출연기관인 한국철도기술연구원을 말한다.

결국 현대로템 철도부문 매각은 35년간 1조원 가까운 정부 예산을 들여 국산화한 고속열차 기술력을 포기하겠다는 정책적 판단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던 셈이다. 애초 현대차가 그룹 차원에서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한 IB업계 관계자는 "현대차가 현대로템 매각을 부인하는 공시를 한 배경에는 매각에 대해 산업부와 충분한 협의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면서 "산업기술보호법은 국가핵심기술을 갖고 있는 기관이 외국인에 의해 인수·합병이 진행되는 것을 인지한 순간 지체 없이 산업부 장관에 신고하도록 의무를 부여하고 있는데, 이런 점도 부담이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