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제조 대기업인 지멘스가 현대자동차가 보유한 국내 철도·방산기업 현대로템의 지분 인수를 추진한다. 현대차는 현대로템 지분 33.8%(작년말 기준)를 가진 최대주주다. 지멘스가 현대로템의 경영권을 인수하려면 현대차가 가진 지분 전량을 인수할 가능성이 크지만, 전량을 인수할지 일부만 인수할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19일 종가 기준 현대로템의 시가총액은 약 2조2650억원으로, 경영권 프리미엄을 포함한 현대차의 지분 가치는 1조원 안팎으로 추산된다.

21일 투자은행 및 자동차 업계에 따르면, 현대차그룹은 지난해부터 현대로템 지분 매각 작업에 착수해 현재 지멘스와 매각 협상을 최종 조율 중이다. 현대차 보유지분을 빼면 현대로템 지분은 국민연금이 5%를 들고 있으며 나머지는 외국인, 기관 및 개인 투자자가 보유하고 있다.

현대로템이 2010년 우크라이나 철도청으로부터 수주한 준고속 전동차

현대차그룹은 지난해부터 현대로템의 구조조정 방안을 고민해왔다. 현대로템은 사업이 크게 철도, 방산, 플랜트로 나뉘는데 매출의 절반을 차지하는 철도 부문이 3년 연속 적자를 기록하는 등 재정이 나빠졌기 때문이다. 현대로템 철도부문은 2018년과 2019년에 각각 417억원, 2595억원의 영업손실을 냈다. 이 영향으로 2018년과 2019년에는 전체 영업손실이 각각 1961억원, 2799억원에 달했다. 작년에는 철도부문 손실액이 116억원으로 줄었고, 전체 영업이익도 820억원으로 흑자전환에 성공했다.

현대차그룹 내부에선 현대로템의 수소 모빌리티 사업을 키워 독자 생존을 모색하는 방안과 해외 기업에 매각하는 방안을 저울질한 것으로 전해졌다. 현대로템은 최근에도 수소를 연료로 사용하는 수소트램(노선 열차)을 공개했다.

그래픽=송윤혜

현대차그룹이 현대로템 지분 매각쪽으로 방향을 튼 것은 철도 사업의 경쟁 가열로 대규모 신규 수주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현대로템의 철도 부문 신규 수주액은 2017년 3조8350억원에서 2018년 2조9830억원, 2019년 2조9550억원, 2020년 2조8000억원으로 매년 줄었다.

철도업계 관계자는 "태국, 말레이시아 등 전세계 곳곳에서 철도 기업들의 수주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며 "특히 일본과 중국 기업은 철도 건설 비용의 일부를 정부 차원에서 지원해주는 등 ‘세일즈 외교’까지 나서고 있어 국내 기업이 설 자리를 점차 잃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지멘스는 상하이 푸동(浦東) 공항과 시내를 잇는 세계 최초의 자기부상열차를 건설하는 등 유럽·아시아 등지에서 활발히 철도 사업을 벌이고 있다. 고속철 벨라로(Velaro), 도심형 전동차 인스피로(Inspiro) 등이 대표 브랜드다.

철도 시장은 최근 몇 년간 치열한 인수·합병전이 벌어지고 있다. 철도 시장 점유율 4위인 지멘스는 현대로템을 인수하면 글로벌 ‘빅3’로 올라설 전망이다.

지멘스는 당초 고속철도 테제베(TGV) 제조사인 프랑스 알스톰의 철도 사업을 인수하려 했으나 2017년 유럽 공정거래위원회가 독점 문제를 거론하며 합병 계획을 무산시켰다. 이후 알스톰은 캐나다의 다국적 기업인 봉바르디에의 철도사업 부문을 인수해 올해 초 인수 작업을 마쳤다.

중국의 최대 철도 회사인 중궈중처(中國中車·CRRC)도 중궈난처(中國南車·CSR)와 중궈베이처(中國北車·CNR)가 2014년 말 합병해 탄생한 공룡 기업이다.

정의선(오른쪽) 현대차그룹 회장이 지난 3월 16일 임직원들과 타운홀 미팅을 진행하고 있다.

매각 작업이 완료되면 ‘미래차 개발’에 집중하겠다는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의 전략도 더 탄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현대차그룹은 정 회장 체제로 넘어가며 그룹의 중장기 전략을 다시 짜고 있다. 비(非)수익 사업은 과감하게 정리하고 미래 모빌리티에 투자하는 등 사업 재편이 한창인 것으로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