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세율 국가들 "방향은 동의, 일률적 21%는 No"
세금 부과하려면 EU 27개 회원국 만장일치 필수
EU 집행위, 과거 세금 인상 문제로 장기간 골머리
FT "EC, 美 업고 자체 개혁 부담 덜기 위해 환영"

유럽연합(EU)이 미국 정부의 '법인세율 하한선' 제안을 두고 내부 반발에 고심하고 있다. 일단 EU 집행위원회 격인 유럽위원회(EC) 차원에서 화답하긴 했지만 27개 회원국 가운데 낮은 법인세율로 다국적 기업들의 인기 거점 지위를 누려온 국가들이 세부 협의 과정에서 반발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새로 부과될 세금은 EU 규정상 회원국의 만장일치가 필요하다.

벨기에 브뤼셀의 유럽연합 이사회 건물 앞에 걸린 유럽연합기.

14일(현지 시각)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파올로 젠틸로니 EC 경제·과세 담당 집행위원은 이날 성명을 내고 "미국의 제안을 환영하다"며 "디지털 대기업 과세를 위해 새로운 국제 규정을 만들고 공통의 해결책을 찾는 것이야말로 최상의 해결책"이라고 밝혔다.

그는 다만 "현재 유럽연합 국가 간 기준의 접점을 찾는 것이 가장 어렵다. 해결책을 강구해야 한다"면서 "유럽에서 논의되는 계획이 미국의 제안과 정확히 같지는 않다"고 선을 그었다. 미국이 제안한 방향에는 동의하지만 구체적인 세율 등 세부 사항을 협의하는 과정에서는 회원국 간 거센 논쟁이 불가피할 거란 의미다.

현재 EU의 27개 회원국 중 법인세율이 낮은 국가로는 헝가리(10.5%)와 키프로스(10.5%), 아일랜드(12.5%)를 비롯해 몰타, 룩셈부르크 등이 꼽힌다. 이들 국가는 낮은 세율로 다국적 기업을 끌어들이는 것이 엄연한 '세율 자주권'이라며 미국발 법인세율 하한선 설정 논의를 경계하고 있다. 미국이 제시한 '21%'를 무조건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아일랜드의 경우 낮은 법인세를 기반으로 페이스북과 구글, 애플, 인텔, 델, 마이크로소프트(MS), 트위터, 에어비엔비 등 글로벌 IT 기업의 유럽 법인을 유치했다. 연구개발비 및 지적재산권 등에 대한 세제 혜택을 포함하면 아일랜드에 적을 둔 외국 기업은 최대 40%까지 세금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이들 기업의 대부분은 아일랜드의 실리콘밸리라고 할 수 있는 더블린 시내 중심가 ‘실리콘 독스(Silicon Docks)’에 자리 잡고 있다.

아일랜드 재무부 측은 "우리는 지속가능하고 공정한 경쟁을 위한 국제적 조세 체계와 경계선이 있어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면서도 "아일랜드와 같이 작은 나라들은 상대적으로 큰 나라들이 규모와 자원, 위치적으로 얻는 이점을 고려해 세금 정책을 '합법적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세제 개혁 버거운 EC, 美 제안으로 부담 덜어내려 환영"

FT는 유럽의 저세율 법인세 국가들이 손해를 감소하더라도 미국 정부의 제안에 화답했지만, 세부 협의 과정에서는 큰 분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최저세율을 일률적으로 통제하는 것 자체가 이들 국가에는 큰 타격이 될 수 있어서다.

특히 과거 세금 인상 논의에 번번이 실패했던 EC가 미국의 제안을 등에 업고 자체적 세제 개혁의 부담을 덜겠다는 판단 하에 이번 결정을 환영한 것이라며 "내부 불협화음을 피해 외부(미국)에서 끌어온 동력이 얼마나 힘을 발휘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고 지적했다. EC가 OECD와 미국을 통해 협상을 벌여 사실상 세제 개혁의 짐을 덜어내려 한다는 것이다.

앞서 EC는 2016년 아일랜드를 상대로 애플이 체납한 세금 143억유로(약 19조1370억원)를 징수하라고 명령했었다. 아일랜드 정부가 일자리 창출 및 기업 유치를 위해 애플에 0.005%의 세율 특혜를 부여해 시장의 공정 경쟁을 훼손했다는 이유다. 이에 반발한 아일랜드가 소송을 제기했고, EU 고등법원은 지난해 7월 애플이 아일랜드에 세금을 낼 필요가 없다고 판결했다. 현재 이 문제와 관련한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올해 초에도 아일랜드와 몰타, 룩셈부르크 등은 EU의 디지털세 부과 방침에 반대했다. 연간 매출액이 750만유로 이상인 다국적 기업은 EU 27개 회원국에 기업의 구체적인 이윤과 세금 납부 사항을 의무적으로 보고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FT는 "각국은 기업이 받을 타격을 우려하고 있다"며 "헝가리와 아일랜드 등이 국제적 최저세율을 거부할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