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전현직 대통령 4명을 포함한 수많은 정치인과 고위관료를 배출해온 ‘엘리트 교육’의 산실 국립행정학교(ENA)가 내년 문을 닫는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8일(현지시각) AFP통신에 따르면,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이날 2022년까지 ENA를 폐쇄하고 공공 서비스 연구소(ISP)라는 이름의 새로운 기관으로 대체하겠다고 밝혔다. 마크롱 대통령은 2004년 이 학교를 졸업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발표에 앞서 주재한 회의에서 공공부문 행정가 양성을 목표로 하겠지만, 다양성을 확보하는 데 더욱 중점을 두겠다고 밝혔다.

ENA졸업생으로는 마크롱 대통령 자신을 포함해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자크 시라크, 프랑수아 올랑드 등 전직 프랑스 대통령이 있다. 또한 현 정부의 내각인 장 카스텍스 총리, 플로랑스 파를리 국방부 장관, 브뤼노 르메르 재정경제부 장관도 이곳 출신이다.

재계에도 영향력이 뻗쳐 있다. 프랑스 통신회사 오렌지, 프랑스 금융그룹 소시에테 제네랄 은행, 프랑스 대형 유통회사 카르푸 등의 경영자들도 ENA출신이다. 베르나르 라티에르 에어버스 공동 창립자, 앙리 드카스트르 전 AXA CEO, 기욤 페피 전 프랑스철도공사 사장도 이곳을 졸업했다.

ENA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5년 10월 샤를 드골 대통령이 행정 엘리트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한 ‘그랑제콜’이다. 그랑제콜은 ‘대학 위의 대학’으로 불리는 프랑스의 소수정예 고등교육기관으로, 여기에 입학한 소수 외에 다른 학생들은 일반 공립대학을 다니게 된다.

설립 당시에는 파리가 아닌 스트라스부르에 세울 정도로 모든 지역·계층에서 인재를 뽑는다는 정신으로 세워졌지만, 시간이 지나며 상류층을 위한 학교로 변질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최근 졸업한 졸업생 80명 중 1%만이 노동계급 출신이었다.

프랑스 피카르디 대학의 안나벨레 알로치 사회학 교수는 ENA가 "사회적 엘리트 재생산의 요람이 됐다"고 평가했다. 프랑스 불평등 연구소에 따르면 부모가 고소득 전문직인 학생은 저소득층 학생보다 ENA에 입학할 확률이 12배 더 높다. ENA 자체 심사관은 자체 연례 보고서를 발표해 ENA 졸업생들 사이에 사회적, 지리적, 지적 다양성이 부족하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실제로 ENA 입학은 성공의 보증수표나 다름 없었다. 필기와 면접시험을 통과해 ENA에 입학하면 공무원 신분이 주어진다. 2년간 수업을 마치고 졸업하면 정부 부처에 바로 취업이 연계된다. 이들은 일정 기간 정부 기관에서 의무적으로 복무한 후, 대기업이나 금융기관으로 옮기는 ‘엘리트 코스’를 일반적으로 밟는다. 39살에 당선된 마크롱 대통령도 ENA를 졸업하고 경제부처에서 일하다가 투자은행 로스차일드로 이직하는 길을 따랐다.

마크롱 대통령이 모교인 ENA를 폐쇄하겠다는 결정을 내린 데엔 이같은 불평등에 대한 프랑스 사회에 누적된 분노가 자리한다. 지난 2018년 말 프랑스 전역에서 마크롱 정부의 유류세 인상에 반대하는 노란 조끼’시위가 발생했다. 2019년 초까지 전국적으로 이어진 시위는 시간이 지날수록 부유층을 지지하는 마크롱 정부 정책 전반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결국 마크롱 대통령은 2년 전인 2019년 대국민담화를 발표해 ENA를 폐지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