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 연장 시공사에 전가하는 ‘발주처 갑질’ 전략 실패 건설사 스스로 의사표시에 대한 책임 가져야

수년이 걸리는 지하철 공사의 공기(工期)가 발주처 탓에 연장됐다. 그렇다면 그에 따른 간접비(현장소장 및 안전관리자 등 인력비, 현장사무소 유지 비용 등)는 시공사 및 건설사들이 책임져야 할까, 아니면 발주처인 시나 지자체가 져야 할까.

기간 연장이라는 원인을 제공한 발주처가 책임지는게 당연한 귀결처럼 보이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시공사가 아닌 서울시의 손을 들어줬다. 공사기간 연장의 원인이 발주처에 있다고 하더라도 건설사가 차수별 계약에서 최소한의 금액 조정 신청을 했었어야 했다고 판단했다.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받지 못한다'는 이른바 자기증명의 책임이 건설사에 있다고 본 셈이다.

건설사들을 대리한 법무법인 화우는 앞선 고등법원 선고들에서 프리패스(free pass·무사통과)처럼 여겨졌던 '발주처 갑질' 전략에 변호사 5명을 써가며 승부수를 띄웠지만, 결국 상대측(법무법인 지평) 변호사 단 한명에게 참패하고 말았다.

일러스트=정다운

◇수차례 변경된 지하철 공사 간접비, 누가내야 할까? 대림산업(현 DL), 두산건설, 삼성중공업 등은 컨소시엄을 구성해 2010년 9월 서울지하철 9호선 3단계 923공구 입찰에 참여했고 낙찰됐다. 이들은 서울시와 지방계약법 24조의 장기계속계약 형태로, 총 준공일을 2016년 3월 21일(총공사금액 904억원)로 부기(장부기록)했다. 이후 그린벨트 행위허가 지연, 실시설계기간 연장, 예산부족, 설계변경 등의 이유로 수차례에 걸쳐 변경계약을 체결하면서 총 준공일을 2018년 12월 31일로 변경했다.

이에 원고들은 총공사기간 연장에 따른 추가 간접공사비 55억2414만여원과 이에 대한 지연손해금을 서울시가 지급해야 한다는 내용의 공사대금 청구소송을 냈다.

1심은 대림산업 등이 낸 5가지 주위적·예비적청구 가운데 예비적 청구 1개만 일부 인용하면서 서울시가 4억3000여 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제6차수 계약의 연장된 공사기간 중 2016년 3월22일부터 그해 5월22일까지의 공사기간 연장에 따른 추가 간접비 상당의 계약금액을 조정할 의무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모든 청구에 대해 서울시 책임이 없다고 봤다.

공사시간 연장을 이유로 한 공사금액 조정신청이 인정되려면 △차수별 계약의 최종 지급이 이뤄지기 전에 계약금액 조정신청을 마쳐야 하고 △조정신청서에 기재된 공사 연장기간이 당해 차수로 특정되는 등 조정신청의 형식과 내용, 시기, 조정금액 산정 방식 등을 종합해 볼때 객관적으로 차수별 공사기간 연장에 대한 조정신청 의사가 명시됐다고 볼 수 있을 정도에 이르러야 한다고 판시했다.

즉 재판부는 "차수별 계약에서 정한 공사기간이 아니라 총괄계약에서 정한 총 공사기간 연장을 이유로 한 금액 조정신청은 적법하다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2018년 10월 대법 전원합의체가 남긴 것 항소심 재판부 판단에 대한 이해를 넓히려면 2018년 10월 3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을 꼭 들여다봐야 한다. 당시 대법은 지방계약법에 규정된 장기계속공사계약으로 입찰을 한 경우, 총괄계약에서 정한 공사기간이 연장됐음을 이유로 계약금액 조정청구를 하는 것은 적법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관련 사안에 대해 대법 전원합의체 해석이 나온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다만 연차계약 연장을 이유로 하는 계약금액 조정신청이 과연 '어느 범위까지 적법한 것으로 봐야 하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는 추후 다수 재판부가 대법 전원합의체 판결의 적용범위를 제한적으로 해석하는데 빌미가 됐다.

실제 서울고등법원 등은 대법 해석과 달리, 총괄계약에서 정한 계약기간 연장을 이유로 한 계약금액 조정의사에는 차수별 기간 연장에 대한 계약금액 조정의사가 포함돼 있다고 줄곧 판결해왔다.

법무법인 지평 박승진 변호사

◇변호사 5명이 붙었는데...지평 변호사 1명에 패배한 화우 건설사들을 대리하는 법무법인 화우는 앞서 서울고등법원 등이 판단한 사례를 제시하는데 주력했다. 공사기간 연장에 따른 불이익을 시공사한테 전가시켰다는 이른바 '발주처 갑질'에 중점을 두고 재판부에 호소했다. 공사기간이 연장된 원인이 예산 부족 등 발주처측에 있는데, 왜 연장에 따른 불이익을 시공사가 감수해야 하느냐는 논리였다. 이 논리를 만들기 위해 변호사 5명이 붙었다.

반면 법무법인 지평은 2018년 대법 전합 법리해석에 주력했다. 고등법원 판례들은 지방계약법에서 정한 '적법한 계약금액 조정신청 요건' 및 법률행위의 해석에 관한 법리를 오해해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있다는 점을 수차례 지적했고, 재판부를 설득시키는데 성공했다. 삼성물산의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간접비 소송 관련 서울시 승소를 이끌어낸 이력이 있는 박승진 변호사 혼자 일궈낸 성과였다.

그는 2012년 서울시 법률고문 위촉을 계기로 도시환경정비사업, 민간투자사업, 공공계약, 공유재산, SOC 건설 관련 분쟁에서 다수의 자문 및 소송을 수행하면서 해당 분야에서 전문성을 쌓아왔다.

박 변호사는 "이번 사건은 2018년 대법원 판례의 법리가 구체적으로 적용된 사안"이라며 "2018년 대법 전합을 무력화 하려는 시도는 법치행정이라는 큰 틀에서 볼때 공사물량 공사비는 당해 예산의 ‘민주적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기본원칙을 무너뜨리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이어 "건설사가 연차계약에 따른 간접비를 받고 싶었다면 이러한 의사가 드러날 정도까지 자기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법원이) 줬다는 점에서 향후 관련 분쟁에서 건설사가 보다 분주해지지 않을까 한다"고 덧붙였다.

즉 ‘사적 자치’는 자율성을 갖는 대신 스스로 의사표시에 대한 책임도 가져야 한다는 것으로 그간 법원이 후견적 지위에서 발주처에 갑질을 당한 시공사의 편을 들어줬다면, 이번 사건을 계기로 장기적으로 분쟁을 예방하는 측면에서 의사해석의 명확한 기준을 세워줬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판결’이라고 자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