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31일(현지 시각) 2조2500억 달러(약 2542조5000억원) 규모의 인프라 투자 계획을 발표하며 이중 500억달러(약 56조4500억원)를 반도체 분야에 투입한다고 밝혔다. 최근 차량용 반도체 품귀 현상으로 각국이 기술 자립화 노력에 속도를 내는 가운데 미국 정부가 국가적 차원의 반도체 생태계 육성에 나서겠다고 공표한 것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021년 2월 24일 백악관에서 자국 반도체 공급망 재검토를 지시하기 앞서 반도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미국 내 반도체 제조 부흥을 위해 바이든 행정부가 500억 달러를 지원한다"며 "이번 발표는 중국의 부상과 경쟁국들의 기술력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나온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실제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중국을 직접 언급하며 이번 부양책이 "중국과의 경쟁에서 승리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인텔 등 미 반도체 기업들은 일제히 환영의 뜻을 밝혔다. 인텔은 이날 발표한 지지 성명에서 "미국이 경쟁력을 유지하고 번영하려면 반도체 산업과 각종 인프라에 대한 지출을 병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 반도체산업협회(SIA)는 반도체를 ‘미국 경제와 일자리 창출, 국가 안보 및 중요 인프라의 근간"이라고 했다.

미국은 1990년대까지만 해도 반도체 설계, 제조 등 수익성이 높은 시장 부문을 장악하며 세계 반도체 생산의 37%를 차지했으나 오늘날에는 12% 수준을 겨우 유지하는 데 그치고 있다. 미국 기업들이 비용 절감을 위해 인건비가 저렴한 아시아 등지로 이동한 데다, 중국을 비롯한 각국 정부가 보조금을 지원하면서 경쟁자들을 부쩍 키워낸 영향이다.

이에 미국 의회는 지난 1월 국방수권법(NDAA)을 통과시킴으로써 반도체 연구개발(R&D) 및 투자에 연방정부 자금을 투입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고, 바이든 대통령은 이후 미국의 반도체 공급망 재검토를 지시하는 행정명령을 내리면서 대규모 지원을 예고했다. 미국 정부는 앞서 자국 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해 2024년까지 투자비의 40% 수준을 세액공제하고, 반도체 인프라와 R&D에 228억 달러(약 25조7100억원)를 지원하겠다고도 밝힌 바 있다.

인텔은 미국 정부의 이처럼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3년 만에 파운드리(위탁생산) 사업 재진출을 밝히기까지 했다. 인텔이 지난달 23일 파운드리 사업 진출을 선언하며 밝힌 투자 금액은 200억 달러(약 22조5600억원)다. 인텔은 이 돈으로 미국 애리조나주 오코틸로에 반도체 공장 2곳을 설립할 계획이다.

대만 TSMC와 한국 삼성전자의 로고.

다만 전문가들은 미국이 자국 내 반도체 생산 역량 강화에 주력하기보다 동맹국과 연대해 반도체 공급망 재검토에 나서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전 세계 대부분의 반도체가 대만 TSMC와 한국 삼성전자 공장에서 생산된다는 점을 감안할 때, 기존 반도체 공급망을 활용하는 것이 신규 반도체 공장에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라는 설명이다.

실제 미 의회 공식 자문기구이자 인공지능(AI) 분야 싱크탱크인 국가인공지능안보위원회(NSCAI)는 지난 2월 발표한 보고서에서 바이든 행정부에 "선진 첨단 기술을 소유한 대만과 한국 기업이 미국에 많은 공장을 설립할 수 있도록 이들 국가와 무역 및 투자 관계를 돈독히 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미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는 지난해 "대만과 미국은 반도체 동맹을 계기로 상호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며 "TSMC 등 대만 반도체 기업들이 미국 기업들과 통합하게 되면 21세기를 이끌어갈 안전한 첨단기술 공급망 구축이 가능하다"고 했다. TSMC는 올해 투자 규모를 최대 280억 달러(약 31조5900억원)로 보고 있으며 삼성전자는 2030년까지 비메모리 반도체에 1160억 달러(약 130조8700억원)를 투자할 전망이다.

한편 중국 정부는 자국 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해 1250억 달러(약 141조원)를 투자할 계획이다. 이와 관련, 미 싱크탱크 애틀랜틱카운슬은 "도널드 트럼프 미 전임 행정부는 중국의 반도체 수출 규제를 강화함으로써 중국 반도체 산업에 큰 제약을 가했지만 중국은 14차 5개년 계획을 발표하면서 자국의 반도체 제조 경쟁력 향상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드러냈다"며 "많은 업계 관계자들은 중국이 이 분야에서 지금은 뒤처지고 있지만 계속해서 발전을 이뤄낼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