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오 기업에 투자한 벤처캐피털(VC)들이 엑시트(투자금 회수)에 난항을 겪고 있다. 한국거래소의 상장 심사가 까다로워져 기업공개(IPO)를 추진하기가 매우 어려워졌다는 것이 업계 관계자들의 중론이다.

문제는 국내 VC들이 최근 3년간 바이오 벤처 기업에 투자한 금액이 약 3조원에 육박한다는 것이다. 피인수·합병을 기대하기 어려운 국내 벤처 업계의 특성상 IPO가 거의 유일한 엑시트 방법인데, 이 출구가 좁아져 투자은행(IB)의 자금경색이 나타날 수도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일러스트=정다운

◇ 상장 후 문제 일으킨 기업 많아진 탓에 거래소 문턱 넘기 어려워져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올해 들어 상장 심사를 철회했거나 심사에서 탈락한 5개 업체 중 4개가 바이오 기술 기업이었다.

지난 1월 14일 상장 심사에서 탈락한 오상헬스케어를 시작으로 같은 달 20일에는 이니스트에스티가 심사를 철회했다. 지난달에는 디앤디파마텍이 심사 미승인을 받았으며, 가장 최근인 이달 4일에는 엑소코바이오가 상장 심사를 철회했다.

이 중 기술특례상장을 시도했던 디앤디파마텍의 경우, 라이센스아웃(기술 수출) 계약 실적이 없다는 이유로 상장 심사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기술특례상장이란 수익성이 낮아도 성장 가능성이 높은 기업이 주식시장에 상장할 수 있도록 심사 기준을 낮춰주는 제도다. 현재까지 총 120개 기업이 이 제도를 통해 증시에 입성했으며, 그 중 84개사가 바이오 업체였다.

디앤디파마텍의 상장 주관사인 NH투자증권 관계자는 "지난해 코로나19 유행으로 미팅을 제대로 하지 못해 라이센스아웃 계약에 차질이 있었다"며 "이 때문에 미국 정부로부터 200억원을 지원받은 실적 등을 대용지표로 제출했는데, 거래소 측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실제로 한국거래소는 올해부터 상장 심사 시 상당히 구체적인 기준을 적용하고 있다. 기술평가 대분류 항목을 기존 기술성 4개, 사업성 2개에서 기술성 3개, 사업성 3개로 조정했으며, 평가 내용을 26개에서 35개로 세분화했다.

이에 대해 박종식 한국거래소 기술기업상장부장은 "새로운 요건을 추가한 것이 아니라 동일한 항목을 좀 더 자세히 풀어서 쓴 것뿐"이라며 "최근 상장 심사에서 탈락한 기업이 과거보다 많아졌을 수는 있지만, 그것이 거래소의 허들이 높아졌기 때문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상장을 추진하는 바이오 기업의 투자자들은 거래소의 상장 심사가 과거와 비교하면 많이 깐깐해졌다고 입을 모은다. 특히 기업의 사업성과 시장성을 꼼꼼하게 따지는 사례가 증가했다고 한다.

한 VC 심사역은 "거래소가 시장성과 관련된 객관적인 데이터를 과거보다 많이 요구하자, 이를 충족하지 못하는 바이오 업체들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헬릭스미스나 신라젠 같이 과거 기술특례로 상장한 일부 기업들이 논란을 일으키며 문제가 되자 어쩔 수 없이 (증시의) 진입 장벽을 높이겠다는 것이지만, 이른 시기에 객관적인 사업성 지표를 명확하게 산출하기 어려운 바이오 산업의 특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지나치게 높은 잣대를 적용하니 괴로울 따름"이라고 토로했다.

◇ 바이오社 몸값 급등하면서 투자금 회수 어려워진 것도 상장 걸림돌

최근 몇 년간 바이오 비상장사의 기업 가치가 지나치게 높아졌다는 점도 엑시트를 어렵게 만드는 요인으로 꼽힌다. 한 번의 투자 라운드에서 수백억원씩 투입하는 사례가 늘자, 많은 비상장 벤처 기업의 몸값이 급등한 상태다.

지난 5일 인공지능(AI) 기반 신약 개발사 스탠다임은 500억원을 투자받았다고 밝혔다. SKS 프라이빗에쿼티(PE)와 대신PE, 인터베스트, KDB산업은행, 에셋원자산운용이 신규 투자자로 참여했으며 카카오벤처스와 LB인베스트먼트, 에이티넘인베스트먼트, DSC인베스트먼트, 원익투자파트너스가 추가 투자했다.

바이오 기업이 한 번에 수백 억원을 투자받은 사례는 스탠다임 외에도 많다. 알테오젠의 자회사 알토스바이오로직스는 지난 1월 DS자산운용과 SJ인베스트먼트 등으로부터 650억원 규모의 투자를 받았다. 넥스트젠바이오는 지난해 산업은행과 한국투자파트너스, DSC인베스트먼트로부터 200억원을 투자받았다.

벤처나 스타트업이 상장 전 대규모 투자를 유치하면 기업 가치가 수십 배씩 높아지는 경우가 많다. 초기에 투자한 VC라면 높은 수익을 보장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미 기업 가치가 높아진 상태에서 투자한 VC가 이익을 내기 위해서는, 피투자기업이 일정 수준 이상의 몸값을 보장받으며 상장해야 한다.

즉 VC는 이익 실현을 위해 피투자사의 기업 가치를 높게 제시해야만 하는데, 이는 거래소의 상장 심사 통과를 더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VC 입장에서는 ‘엎친 데 덮친 격’인 상황이다.

벤처 투자 업계의 한 관계자는 "만약 바이오 업체가 지나치게 낮은 가격에 상장된다면, VC 입장에서는 조금이라도 수익을 내기 위해 전환사채(CB)의 보통주 전환 가격을 대폭 낮출 수밖에 없다"며 "이 경우 발행 및 유통 주식 수가 늘어나 일반 주주들이 주가 하락으로 인한 피해를 볼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

◇ "빠르면 2~3년 내 엑시트해야"...IPO ‘옥석 가리기’ 필요하다는 주장도

VC 입장에서 바이오 기업의 상장을 통한 엑시트가 절실한 이유는 지난 몇 년간 수조원에 달하는 자금을 투입했기 때문이다.

한국벤처캐피탈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바이오·의료 분야 벤처기업과 스타트업에 투입된 VC의 투자금은 1조1970억원에 달했다. 이는 연간 총 투자금(4조3045억원)의 28%를 차지한다.

그래픽=송윤혜

지난 3년간 바이오 벤처에 투자된 금액은 3조1420억원에 육박한다. 전체 투자금 12조원 가운데 4분의 1이 바이오산업에 투입된 것이다.

벤처펀드의 운용 기간이 7년이라면 VC들은 펀드 해산을 약 2~3년 앞두고 바이오 기업에 투자하는 경우가 많다. 즉, 바이오 기업에 투자하고 나서 2~3년 안에 엑시트하길 기대하는 VC가 많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IPO는 VC가 기대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엑시트 수단이다. 기업 M&A가 제대로 이뤄지는 사례가 손에 꼽을 정도로 희박하기 때문이다.

한 VC 임원은 "국내 스타트업이나 벤처 기업의 경우 미국과 달리 기업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고 인수되기보다는 헐값에 매각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고 말했다. 그는 "보유 지분을 세컨더리마켓(구주 유통 시장)에서 매각해 엑시트하는 방법도 있지만, 이 역시 IPO가 가시화돼야만 가능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증권 업계 일각에서는 거래소가 IPO의 문턱을 높여 바이오 벤처의 증시 입성을 제한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한 증권 업계 관계자는 "기술특례상장 제도가 도입되고서 80개가 넘는 바이오 기업이 특혜를 받으며 상장했는데, 그 중 상당수가 몇 년이 지나도록 이렇다 할 결과물을 못 내고 있다"며 "거래소 입장에서는 투자자를 보호하기 위해 바이오 벤처의 옥석 가리기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