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에너지솔루션(전 LG화학(051910)배터리사업부문)과 SK이노베이션(096770)의 전기차 배터리 영업비밀 분쟁에서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가 LG 측의 손을 들어준 것과 관련해,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장기적으로 국내 배터리 산업의 경쟁력이 강화될 수 있다는 의견이 나온다. 이번 소송에서 기업 영업비밀의 가치와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국내 기업들이 기술개발에 더 주력하고, 국내 배터리 산업을 빠르게 추격해오는 중국 배터리 기업들과의 격차를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또 국내 배터리 인력 영입과 기술 확보에 적극적이었던 중국 배터리 기업의 활동에도 일부 제동이 걸릴 것이란 기대감도 나온다.

그래픽=조선비즈 디자인팀

미 ITC가 지난 10일 최종판결을 내리기 전까지 업계 일각에서는 미국이 '공공의 이익(public interest)'을 고려해 SK이노베이션 배터리에 대한 수입금지 결정을 내리지 않을 수 있다는 관측이 나왔다. SK이노베이션이 미 조지아주에 배터리 공장을 짓고 관련 일자리를 만드는 상황에서 배터리 수입이 금지되면 지역 경제 성장이라는 '공익'을 해칠 수 있다는 논리다.

그러나 ITC는 최종적으로 '영업비밀 침해'가 더 중요하다고 보고 SK이노베이션에 앞으로 10년간 미국 내 배터리 수입·생산 금지 명령을 내렸다. 다만 SK의 배터리를 받아 미국에서 전기차를 생산하는 포드와 폭스바겐에 대해서만 각각 4년과 2년의 유예 기간을 허용했다.

그간 양사의 배터리 영업비밀 침해 소송을 두고 업계 의견은 첨예하게 갈렸다. 일각에서는 "국내 기업들이 협력하지 않고 다투는 사이 해외 경쟁사들이 공격적으로 세를 확장할 수 있다" "변호사와 로펌만 배불린다" 등의 비판을 제기한 바 있다.

반면 일부에서는 "영업비밀 침해와 관련해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을 경우 해외 기업들이 국내 기업의 인력과 기술을 손쉽게 빼갈 수 있는 빌미를 마련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실제 중국 배터리 제조사 CATL은 국내 배터리 인력 유치에 공을 들여왔다. 지난해 글로벌 채용 플랫폼 링크드인에는 리튬이온 배터리 전문 연구원 등을 찾는 CATL의 채용 공고가 올라오기도 했다. 업계에서는 중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는 CATL이 배터리 분야 전문성을 지닌 국내 배터리 인력 확보에 나선 것으로 보고 인력 유출에 대한 우려를 표했다.

지난해 초 CATL 링크드인에 올라온 배터리 전문가 채용 공고

스웨덴 배터리 제조사 노스볼트는 2019년까지 홈페이지 회사 소개란에 "LG화학과 파나소닉 출신 우수 인재 채용"이라는 문구를 넣었다가 ITC가 지난해 2월 SK이노베이션에 조기패소 판결을 내린 뒤 돌연 해당 문구를 삭제한 바 있다.

이런 사례만 봐도 ITC의 최종판결이 장기적으로 한국 배터리 산업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현재 한국 배터리 산업의 최대 경쟁자는 중국 기업인데, 향후 중국 기업들의 기술 유출에 속수무책으로 당하지 않으려면 영업비밀 보호에 강경한 입장을 취할 필요가 있다는 게 지식재산권 전문가들의 입장이다. 이번 ITC 판결 같은 법적인 선례가 있으면 향후 중국 기업으로부터 국내 인재와 기술을 지켜나가기 수월할 것이란 설명이다.

손승우 중앙대 산업보안학과 교수는 "중국이 그간 (배터리 뿐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우리 기술과 인력을 많이 빼갔다"며 "이번 소송을 계기로 영업비밀 보호를 중시한다는 중요한 메시지를 전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국정원에 따르면 2015년부터 지난해 10월까지 해외 기술유출 123건이 적발됐으며, 이 가운데 중국이 83건으로 약 70%를 차지했다. 손 교수는 "그간 한국은 미국 등 선진국에 비해 영업비밀에 대한 인식이 상대적으로 낮았는데, 앞으로 영업비밀 보호가 산업 경쟁력 제고로 이어진다는 인식이 확산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한 업계 관계자는 "기업간 인력 이동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이직 과정에서 기업이 수년간 쌓아온 영업기밀을 빼가면 강하게 대응할 수 있다는 모습을 보여줘야 국내 기업들이 시장 우위를 점하고 경쟁력을 지켜나갈 수 있다"고 말했다.

글로벌 기업들은 치열하게 소송전을 벌이면서도 협력을 하고 사업을 확대해왔다. 애플, 삼성전자(005930), 화웨이 등은 끊임없이 크고 작은 소송을 임하고 있지만, 수년간 각자 분야에서 선두 자리를 지켜가고 있다. 기업의 영업비밀과 지식재산권이 보호 받아야 투자와 연구개발(R&D)→공정 경쟁을 통한 성장→재투자라는 선순환 구조가 이어질 수 있다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은 배상금 문제를 놓고 협상에 돌입할 것으로 보인다. 업계에 따르면 LG에너지솔루션은 약 3조원의 배상금을 요구한 반면, SK이노베이션은 연내 상장 예정인 자회사 SK아이이테크놀로지(SKIET) 지분 일부와 소송 비용 등을 포함해 5000억~8000억원을 제시해 양측이 기대하는 배상금 격차가 큰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