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통화량 코로나 후 20% 급증… 미 연준 '고용사수' 인플레 자극
일각선 일플레 우려 일축하기도… "고용없인 소비회복 어려워"
한국선 디스인플레이션 우려 '솔솔'… 넋놓고 보는 원화가치 상승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미국을 비롯한 주요국은 5년여만에 양적완화의 시대로 회귀했다. 중앙은행들은 역대 최저 수준으로 금리를 내리는 동시에 각종 유동성 공급책을 내놨고, 각국 정부는 대규모 재정지출에 돌입했다. 백신 접종이 시작되면서 올해 코로나19 위기가 종식될 것이라는 기대감에 시장은 벌써 부풀어오르고 있다. 하지만 언젠가는 '유동성 파티'도 끝내야 해 이제는 유동성의 역습을 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편집자주]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전세계를 덮친지 9개월, 글로벌 금융시장에서는 달러가 홍수를 이루고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풀렸던 돈이 채 흡수되기 전에 역대급 유동성 공급이 이어지면서 미국의 시중통화량은(M2) 20%나 늘었다.

코로나19 이후 막대한 유동성이 어떻게 작용할 것인지를 두고 벌써부터 논쟁이 분분하다. 내년 상반기가 되면 유동성이 인플레이션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오기 시작했다. 달러가치의 지속적인 하락 속에 미 연준의 통화정책 기조의 변화, 백신 조기 접종으로 인한 경기회복 전망이 주요 근거다. 다만 '고용'의 더딘 회복세로 인플레이션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우리나라의 경우 백신 접종이 다소 늦어질 가능성이 큰 데다 코로나19로 자영업이 큰 타격을 입어 물가가 낮은 상태를 유지하는 '디스인플레이션(물가 상승률이 하락하는 것)'이 올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여기에 환율의 하락은 수입물가를 떨어뜨릴 수 있어 미국과 우리나라 경기간 디커플링(탈동조화)의 가능성도 제기된다.

뉴욕 퀸스의 롱아일랜드 주이시 메디컬 센터의 간호사 샌드라 린지가 화이자ㆍ바이오앤테크의 코로나19 백신을 미국에서 처음으로 접종받고 있다.

◇역대급 유동성 푼 美… 백신 조기접종에 커지는 인플레 우려

지난해 3월 코로나19가 전세계로 번지기 시작하면서 미국은 또 한번 역대급으로 유동성을 공급했다. 지난해 12월 14일 기준 미국의 시중통화량(M2)은 19조2990억달러로 지난해 3월초(15조5128억달러) 대비 19.7% 늘었다. 더군다나 미국 의회는 최근 코로나19 재확산에 대응하기 위해 9000억달러의 추가 부양안을 통과시키면서 앞으로도 추가적인 유동성 확대가 예고된 상황이다.

인플레이션 논쟁에 불이 붙기 시작한 건 백신의 조기 개발이다. 지난달 화이자를 시작으로 모더나, 아스트라제네카 등 글로벌 제약사들이 코로나19 백신 개발에 잇달아 성공하면서 지난해 연말부터 30개국이 접종을 시작했다. 이 때문에 세계경기 회복세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면서 글로벌 주식시장은 역대 최고치를 경신하는 등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상황이다. 실물경기에 앞서 금융시장이 반응한 셈이다.

백신 개발 후 글로벌 전망기관들은 각국의 성장률 전망을 상향 조정하면서 올해 경기에 대한 기대감을 표현했다. 미 연준은 지난달 16일(현지시간) 지난해 미국의 성장률을 -2.4%로 제시해 석 달 전(-3.7%) 대비 상향 조정했다. 올해 성장률도 9월 4.0%보다 소폭 오른 4.2%를 제시했다.

인플레이션 가능성이 나온 이유는 바로 이같은 유동성의 증대와 경제회복에 대한 기대감이 맞물렸기 때문이다. 경기에 대한 불확실성에 한껏 저축률을 높여왔던 가계와 기업의 수요가 늘어나는 반면 코로나19로 훼손된 공급의 회복은 다소 늦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빌 더들리(Bill Dudley) 미 연준 부총재가 지난달 초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코로나19로 공급여력이 줄어든 상황에서 내년 수요가 증가하면 급격한 인플레이션이 불가피할 수 있다"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이다.

여기에 미 연준이 통화정책의 무게추를 물가에서 고용으로 옮긴 것도 일정수준의 인플레이션을 용인하겠다는 뜻을 밝힌 바 있다. 연준은 지난해 8월 물가상승률이 목표치(2%)를 넘더라도 평균적으로 목표치에 수렴하면 금리 인상으로 대응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면서 완전고용을 광범위하고 포괄적인 정책목표로 제시했다. 1970년대 석유파동으로 인한 거대한 인플레이션은 미 연준의 통화긴축으로 잠재워졌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는 의미다.

김진일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백신이 광범위하게 보급되고 생각보다 경기가 빨리 풀리는 시나리오가 가장 좋지만, 인플레이션이 나오는 걱정도 안할수가 없다. 다시 소비를 하고 여행을 시작할 때 공급이 안따라올 수도 있다"고 했다.

◇고용충격, 물가 발목 잡을까… 韓, 원화가치 하락 주목해야

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를 기우로 보는 시각도 적지 않다. 핵심은 고용이다. 미 연준이 앞서 고용에 정책중심을 둔 것도 무엇보다 고용 만큼은 회복이 더딜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근 글로벌 무역량, 수출 등은 회복세를 보이고 있지만, 코로나19 재확산에 고용과 그에 뒤따르는 소비는 지속적인 타격을 입고 있는 상황이다.

미국의 경우 고용시장의 경직성이 상대적으로 적어 코로나19 종식 후에는 실업률 측면에서 대폭 개선이 있을 수 있다. 다만 기업들이 보수적인 채용 경향을 보이고 자동화, 기계화 전환 등으로 임금 인상으로 이어지는 어렵다는 것이다. 특히 미국 청년층의 일자리는 최근 회복세가 강하지만 감염에 취약한 고령층의 경우는 달랐다. 기업들이 채용을 한동안 꺼리면서 '영구 퇴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큰 것으로 전망된다.

박석길 JP모건 이코노미스트는 "글로벌은 물론 한국도 급격하게 물가가 올라갈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며 "목표치에 살짝 못미치는 수준에 머물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선진국에서 인플레이션 논란이 나오는 것과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디스인플레이션 우려가 오히려 더 크다. 저출산 고령화로 노령 인구 비중이 높아 저축률이 높고 소비성향이 애초부터 크지 않은 데다 백신 접종의 불확실성이 크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백신 접종이 빨라야 올해 하반기에나 가능해 고용회복은 물론 소비회복이 상대적으로 더욱 더딜 가능성이 크다.

한은은 지난달 경제전망에서 성장률 전망을 상향하면서도 고용전망 만큼은 눈높이를 낮췄다. 한은은 기본 시나리오 아래 올해 성장률을 3.0%로 상향조정한 반면 취업자수 전망은 13만명으로 제시했다. 지난해 8월 제시했던 20만명 대비 7만명 낮춘 수준이다. 특히 자영업 비율이 높은 경제구조상 대면서비스 타격은 경제충격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한은은 코로나19로 인한 자영업자의 매출 부진이 올해 말까지 지속되면 파산하는 가구는 5만가구를 넘을 것으로 추정했다.

최근 이어진 원·달러 환율의 하락은 물가 하락 압력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달러 대비 원화 가치의 상승은 수입물가를 하락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원화 가치가 오르면 외국인 자본 유입의 유인이 될 수 있어 시장에 달러 공급이 더 늘어날 수 있다. 원화 가치를 낮추기 위해서는 외환당국의 개입이 있거나 통화정책 차원의 조정이 필요한데 이마저도 녹록지 않다. 환율을 올리기 위한 달러 매수 개입은 미 재부무의 환율 조작국 지정 우려와 연관되는 데다 부동산·자산 쏠림 우려에 통화정책 차원의 조정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장민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원화가 강세로 가면 우리나라의 물가는 내려갈 수밖에 없다. 현재 국내에서는 코로나19 불확실성도 너무 크고, 백신 접종에도 상대적으로 많은 시간이 걸려 0% 중후반 수준의 물가가 지속되는 디스인플레이션 우려가 오히려 더 크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