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 살 수 있는 일자리만 얻었으면 하는데 이것도 사치냐”

올해로 3년째 취업 준비를 하고 있는 이모(27)씨의 말이다. 이씨는 “가장 가고 싶던 회사의 채용 공고가 뜨지 않아 시험 기회조차 얻지 못하게 되니 매일 공부하던 게 무용지물이 됐다”며 “스스로 정한 취업 마지노선였던 올해를 넘기게 돼 절망과 불안감만 남았다”고 말했다.

▲지난 21일 취업준비생 2명이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자대학교에 붙어 있는 채용 공고를 살펴보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이 전세계를 강타했던 올해 취업준비생(취준생)들의 고충은 그 어느 해보다 컸다. 경영 악화로 채용 공고를 내는 기업들이 줄어든 것은 물론 감염 우려 탓에 전형별 합격 인원도 다른 해보다 크게 감소했기 때문이다.

한 취준생은 “내년에도 고용시장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며 우울해했다. 그는 “주식, 부동산이 급등했다는 기사를 볼 때마다 마치 내가 다른 세상에 와 있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든다”며 “부자가 되는 건 바라지도 않는다. 먹고 살 수 있는 일자리만 얻었으면 하는데 이것도 사치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 대형 서점에 취업 준비 과정에서 ‘필수 스펙’으로 여겨지는 토익(TOEIC) 자격증 문제집이 쌓여 있다.

◇ 더 높고 좁아진 취업문… 자소서·스펙 업그레이드해도 ‘서탈’

재작년 하반기부터 취업 준비를 시작했다는 지모(26)씨는 “지난해에는 그룹 단위로 공개채용을 진행했던 기업들이 대부분 계열사 수시 채용으로 방식을 바꿨다”며 “수시 채용으로 경력직을 우대하는 분위기가 되면서 올해는 서류조차 낼 기회를 잃었다”고 한탄했다.

지씨는 “작년에 붙었던 자기소개서를 보완해 같은 기업에 냈고, 상반기에 인턴 경력을 쌓았음에도 올해 하반기 서류전형의 벽을 단 한 곳도 넘지 못했다”며 “시험 볼 기회조차 없다는 사실이 사람을 비참하게 만든다. 스펙을 발전시키면 더 좋은 기업에 취직할 수 있다는 희망이 사라져서 올해 처음 정신과 상담을 받을까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한국경제연구원이 전국 4년제 대학 재학생과 졸업생 4158명을 대상으로 ‘취업인식도 조사’를 진행한 결과, 대학생 10명 중 약 8명(75.5%)이 올해 채용 환경이 작년보다 어렵다고 응답했다. 지난해 조사 때보다 29.4% 높아졌다. 응답자 중 절반 이상인 56.8%는 하반기 취업 환경이 상반기보다 더 악화됐다고 답했다.

좁아진 취업문에 진로를 바꾼 취준생도 있다. 지난해까지 사기업 사무직을 준비했던 소모(26)씨는 올해부터 공기업 취직 준비를 시작했다. 소씨는 “기업들이 온라인으로 인적성을 실시하면서 서류합격자 수를 줄였고, 서류는 당연히 붙을 줄 알고 필기 시험 공부를 하고 있던 곳에서 ‘서류탈락’했다”며 “사기업에 비해 나이 압박이 덜한 공기업으로 방향을 틀었다”고 했다.

▲11일 오후 서울 코엑스에서 취업준비생이 면접을 보기 위해 안으로 향하고 있다.

◇ 수강신청 방불케한 자격증 시험 신청… 코로나가 ‘스펙 쌓기’도 가로막아

코로나 사태로 어학이나 자격증 등 취업에 필요한 각종 요건, 이른바 스펙을 쌓는 데도 어려움을 겪는 취준생들이 많았다. 토익(TOEIC) 등 공개채용 지원 자격 중 하나로 기업들이 요구하는 자격증 시험이 코로나 확산 상황에 따라 취소되거나 신청자를 기존보다 적게 받았기 때문이다.

이달 초 일부 금융권 취업 시 필수 자격증으로 여겨지는 자산운용사 시험은 시험일을 불과 나흘 앞두고 취소됐다. 2주마다 정기적으로 치러지던 토익시험은 코로나 확산 상황에 따라 빈번하게 취소되거나 연기됐다. 일 년에 단 두 차례 진행되는 일본어능력시험(JLPT)도 코로나 여파로 서울권에서의 시험이 두 차례 모두 무산됐다.

연세대 4학년생 강모(25)씨는 “국내에서 코로나가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전인 지난 1월에 서둘러 토익과 토스 점수를 일정 수준 이상 받아놨지만, 좀 더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해 추가 시험을 응시하는 것은 어려웠다”며 “친구 두 명은 시험이 취소 돼 원하던 기업에 서류조차 내지 못했다”고 말했다.

소씨는 “필기합격을 한 컴퓨터활용능력 자격증 실기 시험을 봐야 하는데 자리가 없어서 등록하는 게 힘들었다”며 “콘서트 표 구매를 하는 것처럼 초단위까지 알려주는 시계 어플리케이션을 틀어놓고 접수 시간에 맞춰서 들어갔음에도 접수하지 못하는 일이 많았다”고 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재확산 여파로 지난 9월 취업자 수가 39만명 넘게 줄어들며 7개월 연속 감소세를 이어간 것으로 나타난 16일 오후 서울 성동구 성동구청 취업게시판에 구인정보 안내문이 붙어 있다. 이날 통계청이 발표한 9월 고용동향'에 따르면 지난달 취업자 수는 2701만2000명으로 1년 전보다 39만2000명 감소했다고 밝혔다. /이태경 기자

◇ “결국 낙향합니다”…연이은 탈락에 ‘항복선언’한 취준생들

올 하반기 단 한 번도 면접 전형에 올라가지 못한 현모(26)씨는 지난달부터 고향인 경남 양산에서 지내고 있다. 서울 소재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에서 자취생활을 하며 취업 준비를 했던 현씨는 수없이 서류와 면접 과정에서 쓴 잔을 마신 후 육체적으로도, 심적으로도 지쳤다고 했다.

현씨는 “하반기 취업에 실패하고 취업 준비에 대한 의욕을 완전히 잃었다”라며 “당분간 취업준비를 하고 싶지도 않고, 코로나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로 카페에서 공부하고 스터디하는 것도 어려워졌다”고 했다. 이어 “당분간 아무 생각 없이 가족들과 쉬고 싶다”고 말했다.

현씨처럼 취업준비를 잠시 중단한 청년들은 지난달 기준 20만명이 이른다. 통계청에 따르면, 4년제 대학을 졸업한 뒤 지난달 일이나 구직활동을 하지 않고 그냥 쉰 20~30대 청년은 약 19만3000명이다. 지난해 같은 기간(13만7000명)과 비교해 40.4% 늘어난 수치로, 20대와 30대가 각각 10만6000명, 8만7000명이다.

대학원 졸업자와 초대졸자를 합치면 숫자는 더 늘어난다. 지난달 일이나 구직활동을 하지 않은 20·30대 가운데 초대졸자, 대학원졸업자를 합친 숫자는 총 34만6000명에 달했다.

▲그래픽=김란희

◇ “내년도 회복 더딜 가능성 크다던데”… ‘잃어버린 세대’될까 불안한 취준생들

많은 취준생들은 내년에도 취업시장 상황은 올해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가뜩이나 나이나 졸업 여부가 중요한 신규채용 시장에서 코로나 사태로 인해 아무런 소득없이 나이만 한 살 더 먹어 불리한 상황에 놓였다고 낙담하는 사람도 많았다.

내년에 취업준비 3년차에 들어서는 김모(25)씨는 “올해는 기억에 남는 성취나 추억이 하나도 없는 한 해였는데, 새해도 올해와 같을 것 같다는 불안이 앞선다”며 “코로나 사태가 길어지면서 기업이 어려워지면 채용 공고도 더 안 뜰테고, 이러다 영영 잃어버린 세대가 되는 건 아닐지 걱정된다”고 했다.

올해 서류전형에서부터 어려움을 겪었던 지씨는 “일단 사람을 뽑는 어떤 회사라도 들어가서 경력을 쌓아야 하나 고민”이라며 “대학 졸업 후 이른바 ‘칼취업’을 한 친구들 중에는 입사 3~4년차에 접어든 사람도 있는데 나만 도태되고 있는 것 같다”고 한숨을 쉬었다.

이화여대 4학년생인 김모(23)씨도 새해에도 불안정한 생활이 이어진다는 점에 대한 불안이 컸다. 김씨는 “하필 졸업을 앞두고 취업준비를 시작한 올해 코로나가 유행해 하늘이 원망스러웠다”며 “언제 공고가 뜰지도 모르면서 취업을 준비하는 불안정한 생활이 내년에도 이어진다는 게 두렵다. 노력에 걸맞은 결과가 나올 지 모르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