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출과 영업이익 등 종전 재무성과를 중심으로 한 기업가치 평가 방식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습니다. 기업도 환경·사회·지배구조(ESG) 중심의 근본적인 변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올해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ESG 경영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이달 초 열린 도쿄포럼에서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이 환경 문제에 이어 코로나19 사태까지 불러왔다"며 "기업들이 친환경 사업, 사회적 가치 창출, 투명한 지배구조 등을 추구하는 ESG 경영을 통해 인류가 직면한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

SK(034730)는 전사 차원에서 ESG 경영에 앞장서고 있다. 최 회장은 지난 9월 임직원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ESG를 기업 경영의 새로운 축으로 삼겠다"고 선언했고, 계열사 16곳에 ESG 전담 조직을 신설했다. 이달 초 단행한 사장단·임원 인사도 ESG에 초점을 맞췄다. 주요 관계사에서는 ESG 경영을 가속화할 인재가 승진했다. 그동안 그룹 내에서 ESG 전략에 참여한 염용섭 SK경영경제연구소 소장의 사장 승진이 대표적이다.

SK를 포함한 주요 기업들이 ESG에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환경(Environment)·사회(Social)·지배구조(Governance)의 앞글자를 딴 ESG는 기업의 비재무적 성과를 측정하는 지표다. 투자 결정을 내릴 때 기업의 지속가능성이나 사회적 책임 등의 요인을 재무 성과와 함께 고려하는 것이다. 펀드가 주식 투자를 할 때도 ESG를 고려하는 추세다. 대표적으로 네덜란드 연기금(APG)은 한국전력(015760)에 대해 "해외 석탄화력발전 사업에 투자하는 등 온실가스 감축 노력을 소홀히 하고 있다"며 올해 초 투자금 회수에 나섰다.

유럽, 미국 등 선진국의 투자자들은 "ESG를 잘하는 기업이 수익도 좋고 주가도 오른다"고 보고 기업의 ESG 활동을 투자 기준으로 삼고 있다.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많이 버는 기업보다 합리적인 방법으로 사회와 환경에 기여하는 이른바 ‘착한 기업’이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하고 안정적이라 성과도 좋다는 논리다. 7조달러의 자산을 운용하는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미 블랙록은 올해 초 "투자 결정을 할 때 기후변화 대응과 지속가능성을 핵심 지표로 삼겠다"고 밝힌 바 있다.

국내 한 석탄화력발전소 전경

ESG를 지표로 글로벌 자금이 움직이는 데다 기업의 ESG 경영이 기업 이미지는 물론 주가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국내 기업들도 적극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했다. 주요 기업들은 ESG 전담조직을 신설하고, ESG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사업에서는 발을 빼고 있다.

삼성물산(028260)은 글로벌 투자기관들의 항의가 거세지자 최근 "석탄화력발전 관련 신규 사업을 전면 중단하겠다"며 탈석탄을 선언했다. 한화(000880)는 지난달 분산탄 사업을 떼어내 매각했다. 분산탄은 국제사회에서 비인도적 무기로 분류돼 왔고, 유럽에서는 관련 무기를 생산하는 기업에 투자를 금지하고 있다. 한화는 "분산탄 사업을 완전히 정리함으로써 국제사회가 제기해온 환경·사회책임 문제를 해소하게 됐다"고 말했다.

삼성전자(005930)도 지난 3분기 실적 발표에서 "ESG 투자를 확대해 지속가능경영에 박차를 가하겠다"고 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경영철학으로 '동행'을 내걸고 ESG 투자를 본격화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이 부회장은 지난해 삼성전자 50주년 창립기념식에서 "주주, 협력사, 사회가 같이 나누고 함께 성장하는 것이 세계 최고를 향한 길"이라고 말했다.

이밖에 현대차그룹, 포스코, 현대제철, 롯데, GS칼텍스 등도 ESG 경영을 강화하고 나섰다. 재계 한 관계자는 "ESG 경영은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라며 "투자자와 사회가 요구하는 기후변화 대응, 친환경 사업 등에 투자하지 않으면 국제사회의 비난은 물론, 투자 중단과 회수까지 감수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