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연말이 되면 기업 한두 곳에서는 달력을 보내줬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 않네요."

은행이나 관공서, 기업 등에서 연말쯤 무료로 나눠주던 달력이 사라지고 있다. 그나마 시중은행이 만들고는 있지만 제작 규모가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있고, 대기업은 아예 찍어내지 않는 분위기다. 휴대전화 달력 애플리케이션(앱)을 이용하는 사람이 증가하면서 달력 수요가 줄어들 뿐 아니라 비용 절감 목적으로 홍보용 달력 제작에서 손을 떼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대한항공 2019년 달력.

11일 재계에 따르면 기업들은 매년 달력 제작 물량을 줄이는 추세다. 대한항공(003490)은 지난해부터 벽걸이 달력 배포를 중단한 대신 크기가 비교적 작은 탁상용 달력을 직원들에게 2개에서 3개씩 나눠주기로 했다. 매년 업종 특징에 맞게 여행사진전 등 특색 있는 달력을 만들어왔지만, 스마트 기기를 통한 일정관리가 보편화하면서 벽걸이용 달력 수요가 줄었다는 이유에서다.

쉽게 구할 수 있었던 은행 달력도 비용 절감 등의 이유로 매년 제작 부수가 감소하고 있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각 은행은 달력을 매해 최소 500만부씩 제작했지만, 최근 2~3년간 300만부선으로 떨어졌다. 2020년도 달력 기준으로 KB금융(KB국민은행) 달력은 400여만부, 신한금융지주(신한은행)와 우리은행은 각각 약 120만부, 150만부 제작했는데, 전년 대비 20%가량 감소한 규모다.

외국계인 한국씨티은행은 지난 2017년부터 아예 달력과 다이어리 제작을 중단했다. 다른 기업들이 달력 제작 수량을 줄인 것과 같은 이유에서다. 대신 기존 달력 제작에 들었던 비용의 일부를 세계자연기금(WWF)에 기부하고, 고객 편의 제고를 위해 은행의 디지털뱅킹 역량을 강화하는 데 쓰기로 했다.

BMW 등 수입차 회사들도 지난해까지 달력과 다이어리 등을 제작해 VIP 고객들에게 배포했으나, 올해는 아예 본사 차원에서 제작하지 않았다.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으로 인한 경제위기로 직격탄을 맞은데다가 종이 달력을 필요로 하는 수요도 줄었기 때문이다. 볼보, 인디언 모터사이클 등은 올해도 달력과 다이어리 등을 고객들에게 배포했지만, 친환경 종이를 사용하는 등 차별화를 꾀했다.

삼성전자가 구매한 유니세프 달력 이미지(왼쪽)와 삼성SDS가 구매한 JA(Junior Achievement) 달력 이미지.

달력 제작 물량을 줄이는 기업들은 대신 외부 달력을 통해 사회공헌 활동을 하는 추세다. 삼성전자(005930), 삼성디스플레이 등 삼성그룹 14개 계열사는 올해 자체적으로 내년도 달력을 제작하지 않고,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한 비정부단체(NGO) 9곳의 달력 90만개를 구입하기로 했다. 이전까지는 회사 차원에서 자체 제작한 달력을 직원들에게 나눠줬지만 지난해부터 기업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임직원들의 인식을 높이기 위해 구매로 전환했다는 게 삼성 측의 설명이다.

재계 관계자는 "과거에는 회사마다 직원들이 달력을 요청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스마트폰 보급이 확산되면서 2~3년 전부터 관련 요청이 크게 줄었다"면서 "비용 절감 차원도 있겠지만 수요 자체가 줄었기 때문에 제작을 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다만 은행 달력은 이른바 ‘돈 들어온다’는 속설이 있고 고령층 등 종이 달력을 선호하는 수요층이 있다 보니 여전히 인기가 높다. 은행원들이 "달력을 찾는 사람들 때문에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라고 할 정도다. 특히 농협 달력의 경우 날짜가 크게 나온 데다가 이사에 적합한 ‘손 없는 날’ 등이 표시돼 있어 선호도가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올해 역시 농협은 달력과 가계부 등을 발행해 지점을 찾는 고객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은행 달력의 경우 중고거래까지 이뤄지고 있다. 달력을 원하는 고객들에게 달력을 충분히 주지 못하면서다. 은행은 ‘1인 1달력’이나 적금·대출 많은 우수 고객에게만 제공하는 등 나름의 조건을 걸었고 있다. 그럼에도 고객의 많은 문의로 인해 일부 시중은행 입구에는 ‘신년 달력 없습니다’는 내용이 담긴 안내문이 붙기도 한다.

중고나라가 지난해 12월 한 달간 국내 5대 은행에서 제작한 2020년 달력을 거래 물품으로 올린 데이터를 집계한 결과 총 840건에 달했다. 우리은행 달력이 264건으로 거래가 가장 많았고, △KB국민은행 192건 △NH농협은행은 164건 △신한은행 117건 △KEB하나은행 103건 순이었다.

은행에서 배포한 탁상용 달력은 최소 2000원에서 5000원 사이에 거래되고 있다. VIP 고객용 바우처 등을 포함한 달력 등 프리미엄이 붙으면 상대적으로 고가인 1만원 안팎에 거래된다. 2020년도 달력의 경우 하나은행에서 VIP 고객용으로 만든 벽걸이 원화 달력은 15만원에 매물이 올라오기도 했다. 용지가 고급인 데다 특수방식으로 인쇄한 달력과 포장상자를 포함한 금액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