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아 1만명 만든 입덧방지제, 좌우구조 뒤집힌 '가짜약물' 탓
"'카이랄 방향' 검사·조절해 부작용 막자"… 윤동기 교수 등 도전

1957년 독일에서 발생한 ‘탈리도마이드 사건’은 사상 최악의 약물 부작용 사례로 꼽힌다. 약물 성분인 탈리도마이드는 복용 시 진정 효과가 있어 임신부의 입덧 방지제로 시판됐다. 동물실험을 통해 부작용이 없는 안전한 약물로 인정받았지만, 이 약은 유럽을 중심으로 전 세계 1만여명의 기형아 출산을 유발했다. 사후 조사결과 약물 분자구조가 가진 ‘카이랄성(chiral性)’이 원인이 된 것으로 밝혀졌다.

카이랄성을 가진 분자의 예. 각각 왼손과 오른손으로 비유된 두 분자는 원자들의 구성과 연결관계가 같지만 좌우 방향이 서로 달라, 성질도 각각 다른 물질로 분류된다.

물질을 이루는 분자는 원자들의 결합으로 만들어진다. 물질의 카이랄성은 원자들의 연결 관계는 똑같지만 왼손과 오른손처럼 좌우가 서로 뒤집힌 분자구조가 만들어질 수 있는 성질이다. 원자 구성과 결합이 같아도 좌우 구조가 뒤집히면 전혀 다른 성질을 갖는 물질인 ‘거울상 이성질체’가 된다. 탈리도마이드도 의도치 않게 거울상 이성질체가 함께 만들어져 부작용을 유발했던 것이다.

원하는 ‘카이랄 방향’으로만 100% 약물을 합성할 수 있는 방법은 아직 없다. 하지만, 최근 화학자들이 약물 부작용의 원인으로 지목된 카이랄 방향을 제어하는 기술을 잇따라 개발하고 있어 주목된다.

학계에 따르면 의약품의 경우 전체의 절반 정도가 카이랄성 물질로 만들어진 ‘카이랄 의약품’인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중 일부는 탈리도마이드처럼 위험한 거울상 이성질체가 같이 만들어질 수 있다. 결핵 치료제 성분 ‘에탐부톨’의 거울상 이성질체는 실명을 유발할 수 있고, 관절염 등 염증 치료제 성분 ‘나프록센’의 거울상 이성질체는 간에 나쁜 영향을 끼칠 수 있다.

◇韓 화학자들, 부작용 막을 다양한 해법 제시… 보안 분야 응용 가능성도

윤동기 카이스트(KAIST) 화학과 교수는 5일 "현재 의약품의 카이랄 방향을 검사하는 장비가 쓰이고 있지만 비싸서 의약품의 가격까지 높이는 요인이 되고 있다"며 "더 쉽고 저렴하게 검사할 수 있는 기술을 연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윤동기 카이스트 교수팀이 개발한 카이랄 방향 센서 장비 모식도.

윤 교수 연구팀은 작년 12월 고가의 장비 없이 물질의 카이랄 방향을 육안으로 검사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해 국제학술지 ‘어드밴스드 옵티컬 머티리얼즈’에 발표했다. 연구팀은 빛의 편광 현상을 이용했다. 빛을 이루는 전자기장은 원래 모든 방향으로 진동하지만, 구조가 특정 방향으로 '결'이 나있는 물질층을 통과하면 그 방향으로만 진동한다. 이런 빛을 편광이라고 한다.

연구팀은 물질의 카이랄 방향도 일종의 결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이용, 자연광을 통과할 때 생기는 편광의 진동 방향을 측정하는 센서로 카이랄 방향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윤 교수는 "이 연구를 통해 카이랄 방향에 따라 부작용을 갖는 약품들을 제조단계에서부터 실시간으로 검출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최근 연구팀은 이 연구를 이어가는 한편, 처음 의도한 카이랄 방향으로 정확히 합성하는 방법 개발에도 도전, 그 중간성과가 지난 9월 국제학술지 ‘에이씨에스 센트럴 사이언스(ACS Central Science)’에 표지논문으로 실렸다. 연구팀은 ‘크로모닉 액정’이라는 물질을 왼쪽이나 오른쪽 한 방향의 카이랄성으로 균일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향후 약물 등 다른 물질에도 이 기술을 적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윤동기 카이스트 교수팀의 최근 연구성과가 표지논문에 실린 두 국제저널. 왼쪽은 카이랄 방향을 조절해 물질을 만들 수 있는 기술 개발, 오른쪽은 이를 지폐 등의 보안패턴 강화에 응용할 수 있음을 보인 연구에 대한 내용이다.

장석복 기초과학연구원(IBS) 분자활성 촉매반응 연구단장 연구팀도 비슷한 목표로 연구 중이다. 연구팀은 약물을 만드는 화학반응에 필요한 촉매로 카이랄 방향을 조절해냈다. 왼쪽 카이랄 전용 촉매와 오른쪽 카이랄 전용 촉매를 따로 만들어, ‘감마-락탐’이라는 물질을 합성할 때 원하는 촉매를 사용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연구팀은 현재 이 기술의 적용 범위를 다른 물질로 넓히고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고 IBS 관계자는 전했다.

화학자뿐만 아니라 광학자도 나섰다. 노준석 포스텍(POSTECH) 기계공학과 교수는 "물질 구조와 빛의 상호작용을 이용해 카이랄 방향을 알 수 있는 값싼 센서 기술을 10년 가까이 개발하고 있다"며 "지난 9월 국제학술지 ‘빛:과학과 응용(Light:Science and Applications)’에 중간성과를 발표했다"고 했다. 노 교수 연구팀은 2018년 금(金) 입자에 카이랄성을 부여한 후 원하는 카이랄 방향으로 조절하는 데 성공해 학계에 보고한 바 있다.

현재까지의 연구가 다른 분야로 응용되는 성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윤 교수 연구팀은 지폐 등의 보안 패턴에 쓰이는 물질의 카이랄 방향을 임의로 조절해 더 복잡한 보안패턴을 구현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다. 이 연구성과는 국제학술지 ‘나노스케일(Nanoscale)’ 12월호에 표지논문으로 실렸다.

1990년대 들어 미국, 유럽 등의 보건당국은 약물 합성 후 물질 구조 분석과 안정성 시험 등을 통해 거울 이성질체의 발생 여부와 영향을 평가하는 가이드라인을 만들었다. 우리나라 식품의약품안전처도 ‘광학이성질체 의약품 가이드라인’을 통해 "각각의 거울상 이성질체는 서로 다른 약물동태학적 특성(흡수, 분포, 대사, 배설)과 서로 다른 약리효과, 독성을 나타낼 수 있다. 그러므로 거울상 이성질체 의약품을 개발하고자 할 때는 충분한 입체화학적 문제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며 세부 지침을 규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