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수출기업 A사는 12월 예정됐던 계약이 모두 취소됐다. 2달 가까이 이어진 ‘선박 대란’으로 납기를 맞추기 어려워지면서 결국 계약이 무산됐다. HMM(옛 현대상선) 등 국적 선사들이 컨테이너선을 임시 투입하고, 정기 노선에도 일부 공간을 중소 수출업체에 내주면서 그나마 선박을 구할 여지는 생겼었다.

하지만 컨테이너 박스를 구하기가 어려웠다. 있는 컨테이너 박스 가격도 천정부지로 오르면서 말 그대로 ‘부르는게 값’이라고 한다. A사의 대표이사는 "컨테이너 박스를 찾기도 어렵고, 찾아도 가격 때문에 도저히 이용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지금은 손을 놓고 있다"고 했다.

화물차가 중국 칭다오항에서 컨테이너 박스를 옮기고 있다.

컨테이너 박스 품귀 현상이 이어지고 있다. 미국이나 중국으로 물동량이 쏠리면서 나간 공(空)컨테이너 박스가 돌아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미국과 중국의 항만에선 적체 현상이 심해지면서 쌓여있는 공컨테이너 박스를 처리하는 것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한국에선 컨테이너 박스가 없어서 문제고, 미국과 중국에선 너무 많아서 문제인 셈이다. 업계에선 계절적 요인으로 컨테이너 박스 부족 현상이 나타나는 일은 있어도, 대륙간 수급 불균형으로 이런 문제가 벌어지는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4일 해운업계에 따르면 미국과 중국에선 컨테이너 박스가 빈 상태로 2달 넘게 창고에서 머물고 있다. 독일의 프라운호퍼 해양물류서비스센터(Fraunhofer CML)와 컨설턴트 업체 컨테이너 엑스체인지(Containers xChange)가 공동 연구한 결과다. 조사 결과 중국에선 평균 61일, 미국에선 평균 66일 동안 컨테이너 박스가 빈 상태로 방치되고 있다. 전 세계 평균인 45일보다 더 길었다.

다만 미국과 중국의 사정이 다르다는게 업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미국은 물건을 싣고 온 컨테이너 박스가 말 그대로 빈채로 남아있는 반면, 중국에선 물건을 싣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상태인 컨테이너 박스들이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 중국에서 공컨테이너 박스가 많아보여도 정작 구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라고 한다.

컨테이너 엑스체인지의 컨테이너 가용성 지수(CAx) 역시 지난달말 기준 0.03을 기록, 올해 최저점을 찍었다. 이 지수는 0.5를 기준으로 빈 컨테이너 박스가 적을 수록 숫자가 줄어든다. 그만큼 현재 쓸 수 있는 컨테이너 박스가 부족하다는 의미다.

그동안 컨테이너 박스 부족 현상은 연말 성수기 때 자주 나타났다. 수출 국가인 우리나라에서 미국이나 중국, 유럽 등으로 향하는 헤드홀(head haul) 물동량에 비해 돌아오는 백홀(back haul) 물동량은 늘 부족하기 때문이다. 통상 컨테이너선 선복량(적재능력)에 80%를 채우고 떠나면 돌아올 때는 50% 수준이라고 한다. 수출이 몰리는 시기에 국내에서 컨테이너 박스를 구하기 어려워지는 이유다.

하지만 올해는 이 문제가 더 심각해졌다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미국의 LA항과 롱비치항에선 배를 댈 선석을 얻는 데만 길게는 1주일이 걸리는 상황이다. 하역에도 추가로 1주일이 더 필요하고 육상 물류도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여파로 적체 현상이 심화됐다. 그만큼 컨테이너 박스가 돌아오는 데 걸리는 시간도 길어졌다.

업계 관계자는 "물건을 내리는 것조차 어려운 상황에서 컨테이너 박스를 국내에 빨리 들여오고 싶어도 방법이 없다"며 "이같은 현상이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계절적 요인이 아닌 대륙간 수급 불균형으로 인한 컨테이너 박스 품귀현상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이에 중국 춘절(2월)을 기점으로 해결되던 컨테이너 박스 부족 문제가 더 장기화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장기계약을 할 여력이 안 되는 중소기업들의 어려움도 길어진다는 뜻이다.

대안은 크게 2가지다. 우선 컨테이너 박스 공급량을 늘리는 것이다. 하지만 전세계 컨테이너 박스 생산량의 90%를 차지하는 중국 업체들은 생산 물량을 늘리지 않고 있다. 오히려 컨테이너 박스 단가만 올랐다. 올해 상반기 1TEU(6m 컨테이너 1개)당 1700달러 수준이었던 가격이 최근 3000달러도 넘어섰다.

국내에서 출발하는 컨테이너선의 운임을 올리는 것이 현실적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현재 중국발 컨테이너선 운임에 비해 부산항 등에서 떠나는 컨테이너선 운임이 상대적으로 낮은 만큼, 운임을 올려야 더 많은 배가 기항하고 그만큼 컨테이너 박스 회전율도 오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주 서안노선을 기준으로 반년 사이 1TEU당 운임이 2배 이상 올라 4000달러를 넘었다. 운임을 추가로 올리는 것은 국내 수출업체 입장에선 부담이다.

업계 고위관계자는 "운임은 낮추면서 컨테이너 박스와 선박 투입량은 늘리는 일은 모순된다"며 "상생하는 방안을 찾아야겠지만 현재 국적선사 여력만으로는 쉽지 않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