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아세안 10개국, 중국, 일본, 호주, 뉴질랜드 정상들이 15일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협정문에 최종 서명했다. 각국 비준 절차가 남았지만 사실상 세계 최대 규모의 자유무역협정(FTA)이 출범하게 됐다. 정부는 "글로벌 통상 불확실성을 완화하고 자유무역 확산을 도모할 것으로 기대한다"면서 "다자체제의 약화와 글로벌밸루체인의 블록화·지역화 경향에도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고 RCEP 체결 의미를 설명했다.

다자간 FTA인 RCEP의 15개 회원국 경제규모는 전 세계의 30%를 차지하고 RCEP 회원국 인구 합계는 22억6000만명으로 전세계의 29.9%에 달한다. 명목 국내총생산(GDP)과 무역규모는 각각 26조3000억달러, 5조4000억달러로 전세계 비중의 30.0%, 28.7%를 차지한다. GDP, 무역규모가 각각 24조4000억달러(27.9%), 2조5000억달러(13.6%)인 미국, 캐나다, 멕시코 통합 시장인 USMCA(구 NAFTA)보다 크다. 미국이 빠진 포괄적·점진적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의 GDP, 무역규모는 각각 11조3000억달러, 2조9000억달러다.

주요 다자간자유무역협정(FTA) 규모 비교

RCEP는 2012년 협상 개시 선언 이후 공식협상 31회, 장관회의 19회, 정상회의 4회를 거쳐 8년만에 체결됐다. 정부는 아직 최종 RCEP 협정문을 공개하지 않았다. 협정문은 20개 챕터, 17개 부속서 등 약 1만5000쪽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산업통상자원부·농림축산식품부 등이 협정문의 일부 내용을 소개했다.

정부 발표를 종합하면, 아세안 국가들과는 상품 부문에서 이미 체결된 양자간 FTA를 개선해 추가로 상대국 시장 개방 수준을 높였다. 기존 한·아세안 FTA보다 품목별 관세를 추가로 철폐하면서 관세 철폐 수준을 79.1~89.4%에서 91.9~94.5%까지 끌어올렸다. 서비스 시장에서는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등에서 음반, 영화, 공연 등의 사업을 하는 합작법인 설립이 허용되면서 한류 산업에 새로운 기회가 열릴 수 있게 됐다. 투자 부문에서 아세안 국가들과는 최혜국대우 도입, 이행요건 부과 금지 등을 통해 한·아세안 FTA보다 높은 수준의 투자 자유화 규범을 확보했다.

중국, 호주, 뉴질랜드에 대해서는 이미 체결된 양자 FTA 범위 내에서 개방 수준을 유지했다. 일본과는 상품 부문에서 양자간 철폐 수준을 품목수 기준 83%로 맞췄다. 자동차 정밀기계 등 민감 품목은 이번 협정에서 빠졌고, 개방 품목도 장기간에 걸쳐 관세를 철폐하기로 했다. 농수산물의 경우 대체적으로 현재 개방 수준이 유지된다.

지역내 무역 규범이 통일되고 수준이 높아진 것도 RCEP의 성과다. 예를 들면 과거 한국에서 중국, 아세안, 호주 등으로 세탁기를 수출할 경우 원산지 기준이 각각 달랐지만 이번 RCEP 체결로 이 기준이 통일됐다. 또 전자상거래 및 지적재산권, 투자자유화 분야의 규범 수준도 높아졌다.

이번 RCEP 서명으로 사실상 일본과 최초의 FTA를 체결하게 됐다. 일본을 제외한 나머지 회원국들은 한국과 양자 FTA를 체결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한국은 세계 경제 규모 상위 10위 국가 중 브라질을 제외한 모든 국가들과 FTA를 체결하게 됐다. 그러나 RCEP에도 불구하고 한일 간 교역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양국 모두 제조업 분야 경쟁력은 높지만 농업 분야 개방을 민감하게 여기고 있어 이번 협정 수준이 높지 않기 때문이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일본과 최초의 FTA를 체결한다는 점과 우리 산업의 일본에 대한 민감성을 고려해 국익에 맞게 협상을 마무리했다"고 했다.

농수산물 등 분야에서는 핵심 민감품목인 쌀·고추·마늘·양파·사과 등과 수입액이 많은 바나나·파인애플 등 민감품목을 양허제외로 보호했다. 아세안에는 구아바, 파파야, 망고스틴 등 일부 열대 과일을 개방했다. 중국에는 과거 FTA에 포함되지 않았던 녹용, 덱스트린 등을 개방했고 호주에는 소시지케이싱을 추가 개방했다. 뉴질랜드에는 추가 개방 품목이 없다. 농식품부는 원산지 기준과 관련 "신선 농산물의 경우 RCEP 역내에서 우회 수입을 방지하기 위해 엄격한 원산지 기준을 적용했고, 가공식품의 경우 국내 원료수급 여건과 수출 가능성 등을 고려해 상대적으로 완화된 기준을 적용했다"고 밝혔다.

인도는 RCEP 출범시부터 협상에 참여했지만 작년 RCEP 정상회의에서 불참을 선언한 뒤 협상 테이블로 복귀하지 않았다.

향후 RCEP은 비준을 위해 국무회의 및 국회 논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RCEP은 아세안 10국 중 6국 이상, 비(非) 아세안 5국중 3국이 국내 비준후 사무국에 비준서를 보내면 60일후 발효하게 된다.

한편 정부는 최근 미국 대선에서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가 당선되면서 CPTPP와 RCEP을 미국과 중국간 대립 구도로 보는 일각의 분석에 반박했다. 산업부 관계자는 "RCEP 협정문에 아세안 주도를 명기했는데 만약 중국이 주도했다면 이같은 문구를 용납했겠느냐"라며 "또 미국의 핵심 우방인 일본과 호주 등도 RCEP에 합류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