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품·의약품 맛 평가 대신하는 미각센서
단·신·쓴·짠·감칠맛에 와인 떫은맛까지
英 연구팀, 식감 측정 위한 원천기술 개발

전자혀(왼쪽)가 사람의 혀(오른쪽)를 흉내낸 것을 표현한 그림.

사람을 대신해 맛을 측정해주는 ‘전자혀’가 발전하고 있다. 최근에는 미각뿐 아니라 식감까지 감지할 수 있는 기술이 해외에서 개발됐다.

국내에서 전자혀를 개발 중인 고현협 울산과학기술원(UNIST) 교수는 14일 "현재 전자혀는 맛을 내는 화학성분만 감지하는 화학 센서에 가깝다"며 "사람 혀의 일부분만 모방하고 있는 전자혀가 식감까지 느낄 수 있다면 식품·의약품 개발 과정에서의 활용성이 크게 높아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11일(현지시각) 미국과학진흥협회(AAAS)의 논문 소개 사이트 ‘유레칼러트(EurekAlert)’는 영국 리즈대 연구팀이 실리콘으로 사람 혀의 복잡한 표면과 습윤성(표면에 수분이 배어드는 성질)을 모방하는 데 성공했다고 전했다. 연구성과는 미국화학회(ACS)가 발간하는 ‘ACS 응용물질 및 계면(Applied Materials & Interfaces)’에 지난달 26일 게재됐다.

◇정확한 미각센서, 5가지 기본 맛 넘어 다채롭게 느낀다

혀의 표면은 작은 돌기들로 이뤄져있다. 돌기 아래의 미뢰(味蕾)에는 미각을 감지하는 세포들이 모여있다. 미각세포는 액체 속 특정 성분을 감지해 그 정보를 뇌로 전달, 사람이 맛을 느끼도록 한다. 이렇게 느낄 수 있는 기본적인 맛은 5가지다. 당(糖)은 단맛, 산성 물질은 신맛, 염분은 짠맛, 무기물과 카페인 등은 쓴맛, 아미노산의 일종인 글루탐산은 감칠맛을 느끼게 한다. 사람이 느끼는 다양한 맛은 이 5가지 기본 맛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고현협 울산과학기술원(UNIST) 교수팀이 지난 6월 개발한 ‘전자 혀’(왼쪽)와 이것을 구강 모형에 부착한 모습(오른쪽).

음식, 음료 등 식품을 개발할 때 맛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일이 필요하다. 피실험자를 모집하는 경우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고 맛에 대한 평가가 주관적일 수 있다. 맛을 내는 성분들의 농도를 정량적으로 측정하는 전자혀가 필요한 이유다. 전자혀는 의약품 개발 과정에도 활용된다. 약의 쓴맛을 줄여주는 물질을 첨가할 경우 아직 안전성이 확인되지 않은 약물을 전자혀가 대신 맛볼 수 있다.

전자혀는 키요시 토코(Kiyoshi Toko) 일본 규슈대 교수가 20년전 세계에서 처음으로 고안하고 개발했다. 그는 지난 2000년 5가지 기본 맛을 감지할 수 있는 최초의 전자혀를 개발하고 그 성과를 국제학술지 ‘센서와 작용기 B: 화학(Sensors and Actuators B: Chemical)’에 ‘미각센서(Taste Sensor)’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발표했다. 2006년 상용화도 맨 처음으로 이뤄졌다. 2014년 학술지 ‘센서(Sensors)’에 게재한 논문에서 그는 "(개발한)미각센서는 인텔리전트 센서 테크놀로지(Intelligent Sensor Technology)를 통해 세계 최초로 상용화됐다"고 말했다.

인텔리전트 센서 테크놀로지의 제품 ‘TS-000Z’(왼쪽)와 제품의 미각 측정 원리를 설명한 그림(오른쪽).

현재 제품들은 혀의 점막이 ‘탄닌’이라는 성분에 눌려서 느껴지는 떫은맛, ‘캡사이신’ 등에 의한 아픈 느낌인 매운맛처럼 미각 외 감각들도 일부 감지할 수 있다. 인텔리전트 센서 테크놀로지와 프랑스 업체 인스트루먼트 솔루션(Instrument Solution) 등 업체는 자사 제품이 현재 풍성함(richness), 날카로움(sharpness), 금속성(metallic)도 느낄 수 있다고 소개한다. 인텔리전트 센서 테크놀로지 제품 ‘TS-000Z’는 맛을 내는 성분이 혀에서 사라지고 난 후 생기는 ‘끝맛’까지 포함해 11가지 맛 정보를 알 수 있다. 끝맛은 센서에 들어온 성분에서 한차례 맛을 느낀 후 센서를 세척해 다시 한번 감지하는 방식으로 측정된다.

◇고현협 교수팀, 와인 떫은맛 감별하는 로봇 소믈리에 개발

특히 떫은맛 감지 기술은 와인의 품질 평가를 위해 중요해지고 있다. 올해 국내에서는 떫은맛을 더 정밀하게 측정할 수 있는 전자혀가 개발됐다. 지난 6월 고 교수 연구팀은 다공성 구조 물질인 ‘뮤신’을 이용해 이같은 성과를 거뒀다고 국제학술지 ‘사이언스 어드밴시스(Science Advances)’에 발표했다.

뮤신은 탄닌과 만나면 전기전도도가 변한다. 이 변화를 측정해 떫은맛의 정도를 알 수 있다. 이 원리를 이용해 사람이 느낄 수 있는 떫은 맛보다 수십분의 1 수준으로 옅은 맛도 느끼는 전자혀를 만들었다. 연구팀은 "미각 전문가는 수십 마이크로몰 농도의 떫은 맛을 검출할 수 있는 데 반해 이번에 개발된 전자 혀는 2~3마이크로몰 농도 수준의 떫은 맛까지 검출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실험결과 전자혀는 레드와인, 화이트와인 등 종류별 와인의 떫은 맛을 정량적으로 감별해냈다. 감지 속도도 센서에 물질이 닿는 즉시 맛을 느낄 정도로 빨랐다.

고 교수는 "개발한 전자혀가 더 다양한 맛을 느낄 수 있고, 여러 맛이 섞여있을 경우 구분해낼 수 있도록 후속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복잡한 혀 표면구조 따라해 식감까지 정복

전자혀가 여전히 느끼지 못하는 맛의 요소가 남아있다. 식감이다. 씹을 때 느끼는 감각, 즉 혀의 표면과 음식 사이의 기계적 마찰로 생기는 식감은 뇌가 인식하는 맛에 영향을 미친다. 아삭아삭하거나, 부드럽거나, 질기거나, 쫀득쫀득하거나 하는 느낌을 준다. 전자혀가 식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실제 혀 표면의 복잡한 돌기 구조와 습윤성을 모방해야 한다. 이 수준까지 발전한 전자혀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 혀 표면(왼쪽)과 영국 연구팀이 실리콘으로 만든 표면(오른쪽). 색깔로 높이를 구분해 표현했다.

최근 영국 리즈대 연구팀이 처음으로 새로운 전자혀 개발의 가능성을 열었다. 연구팀은 성인 15명의 혀 표면을 광학 스캐닝 기술로 분석했다. 돌기의 밀도, 지름, 높이를 측정해 그 전체 구조를 컴퓨터로 재구성했다. 재구성한 구조를 설계도로, 실리콘을 재료로 삼아 3차원(3D) 프린터로 출력했다. 실리콘 표면이 적절한 수분을 머금을 수 있도록 계면활성제를 첨가, 실제 혀의 습윤성을 구현했다.

실험결과 실리콘 표면은 사람 혀와 비슷한 마찰 특성을 보였다. 전자혀에 활용할 경우 사람과 비슷한 식감을 느낄 것이라는 의미다. ‘식감센서’에 닿는 음식물의 마찰 특성을 측정한 후 아삭함, 부드러움, 질김 등으로 분류해 식품 개발자들에게 알려줄 수 있다. 연구팀은 "혀를 모방한 표면은 식품·의약품 개발을 가속화하고 소프트로봇 분야에 응용될 수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