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준비한 '4세대 원전', 文 정부 출범 1년만 예산 40%로
"연구과제 축소에 고용 불안" VS "정책 맞춰 변화 불가피"
노동 전문가 "공공 연구성과 떨어져 공익 훼손 우려"

16일 오전 한국원자력연구원 노동조합이 대전 본원 앞에서 시위를 하고 있다.

우리나라 원자력 연구개발(R&D)을 주도해온 한국원자력연구원이 노사 갈등에 시달리고 있다. 탈원전 정책으로 ‘연구과제 절벽’을 맞이하면서 연구·기술직 종사자들이 고용 불안을 호소하고 있지만, 연구원측에도 마땅한 해결책이 없기 때문이다.

17일 원자력연 관계자는 "지난 3년간 실질적인 연구과제 규모가 급감하는 ‘연구과제 절벽’을 경험하고 있다"고 밝혔다. 원자력연에 따르면 한해 사업 규모는 2017년 5200억원이었지만 2018년 4700억원, 작년 4300억원으로 줄었다. 원자력연은 "원자력을 둘러싼 급격한 환경변화에 따라 기관 내부에서도 위기의식이 높아졌고 그간의 관행에 얽매이지 않는 체질개선이 필요해졌다"고 했다.

2018년 4월, 원자력연의 핵심 사업이었던 ‘파이로프로세싱(파이로)·소듐고속냉각로(SFR)’, 일명 4세대 원전 사업의 예산 규모가 40%로 축소된 탓이다. 4세대 원전은 원천기술 기준 20여년간 준비돼왔지만, 핵무기 재료인 플루토늄을 생산할 가능성이 있다는 미국의 문제 제기와 정치권·시민단체의 중단 요구가 꾸준히 이어져왔다.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인 2017년 12월 이 사업에 대한 재검토위원회가 출범했고, 4개월만에 전면 재검토가 결정됐다. 시설 건설과 실증을 위한 사업 예산을 전액 삭감하고, 올해 말 재개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최소한의 한미 공동 연구만을 이어가기로 하면서 총 예산이 기존 2900억여원에서 1200억원으로 줄었다.

재직자 1600여명 중 4분의 3인 1200여명이 소속돼 있는 원자력연 노동조합은 지난 7월부터 매일 아침 출근 시간에 대전 본원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연구과제 축소에 따른 인건비 조정과 관련된 정책들과 그 절차에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최근에는 양측이 고용노동부를 사이에 두고 근로기준법 위반 여부를 다투고 있다. 노조는 "사측이 ‘위촉연구원’의 고용조건과 관련해 근로기준법을 위반했다"며 이를 시정해달라는 진정서를 지난 7월 22일 대전지방고용노동청에 제출했다.

위촉연구원은 IMF 외환위기 이후 원자력연의 정년이 만 65세에서 61세로 줄어든 후, 정년 퇴직자의 고용 연장을 위해 도입한 계약직 제도다. 근로시간에 비례해 임금을 받는다. 노조는 이들의 고용 안정을 위한 ‘근로시간 보장 규정’을, 원자력연은 연구과제 축소에 따른 ‘근로시간 조정 규정’을 내세우고 있다. 지난 8월 노동청 근로감독관의 중재가 한차례 무산된 후 양측은 오는 28일 노동위원회의 심의를 기다리고 있다.

원자력연은 신산업 창출을 통한 근본적 문제 해결을 위해 올해부터 ‘혁신 원자력 연구개발 기반 조성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 경북 경주에 초소형원자로 등을 연구하는 ‘혁신 원자력 연구단지’를 구축해 대형 원전 사업의 빈 자리를 채우겠다는 것이다. 2030년까지 경주 분원에서 일할 인력은 현재 대전 본원 인원(1600여명)의 3분의 1 수준인 500명 정도로 검토되고 있다. 노조는 "파견을 원치 않는 인력을 보내지 않겠다는 원장의 약속을 명문화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미 대전에 경제적 기반을 갖춘 연구자들의 동의없는 계획이라는 것이다.

원자력연은 "아직 정해지지 않은 계획"이라며 "임기가 3년뿐인 원장이 이것을 뛰어넘는 인사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또 500명 중 350명은 신규채용을 계획하고 있어, 필요한 전체 인원을 대전에서 보낼 일은 없다고 했다. 관계자는 "반발하는 것도 이해한다"면서도 "정부 정책과 대외환경 변화에 맞는 기술 개발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고 말했다.

노조의 법률 상담을 맡은 유성규 노무사는 "공공 연구기관에서 갈등이 계속되면 구성원들의 연구성과가 떨어져 공익이 훼손될 수 있다"며 "공익적 목적으로 세워진 조직에서 구성원들 다수가 반발할 만한 비민주적인 운영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에 원자력연은 "불필요한 갈등을 방지하고 문제 해결을 위해 지속적인 실무협의 요청과 노사협의회 개최 등의 노력을 해왔다"며 "올해 단체협상을 포함해 앞으로도 노조의 요구사항에 귀기울일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