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군주."

2011년 미국 경제 전문지 포브스는 태국 왕실을 이렇게 소개했다. 태국 왕실은 엄격한 왕실법에 따라 재산 규모를 공개하지 않지만 당시 포브스는 태국 왕실 자산 규모가 최소 300억달러(약 34조원)에 달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10년이 지난 지금은 어떨까. 영국 파이낸셜타임즈(FT)는 13일(현지 시각) ‘태국 왕실재산관리국(CPB) 관리 재산은 최소 400억달러(약 46조원) 수준으로 10년 전에 비해 33% 이상 늘었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막대한 부를 자랑할 수 있을지 불투명하다’고 전했다.

태국에서 젊은층을 중심으로 반(反)정부 시위가 퍼지는 가운데 학생들에 이어 야권 지도자까지 왕실 개혁을 공개적으로 촉구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최근 한달새 태국에서는 그간 성역(聖域)으로 여겨져 온 왕실 금고를 직접 겨냥한 날선 개혁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타나톤 쯩룽르앙낏 전(前) 퓨처포워드당(FFP) 대표는 최근 일본 교도통신과 인터뷰에서 왕실을 둘러싼 문제는 그동안 자국의 "불편한 진실"이었다면서 "태국이 민주주의 국가로 나아가기 위해선 군주제 개혁 절차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1932년 입헌군주국이 된 이후, 태국 국왕은 헌법상 상징적인 국가원수에 불과하지만, 여전히 그 권위는 대단하다. 여전히 법으로 ‘국왕·왕비·왕세자를 비방하거나 위협한 자는 3년형에서 최고 15년형이 선고될 수 있다’고 정해뒀을 정도.

2016년 12월 서거하기 전까지 70년간 집권한 푸미폰 아둔야뎃(라마 9세) 국왕은 말 그대로 ‘살아있는 부처’로 존경 받았다. 그러나 푸미폰 국왕 서거 후 아들 마하 와치랄롱꼰(라마 10세) 국왕이 왕위를 물려받자 20~30대 젊은 층 사이에서 불만이 일기 시작했다.

마하 와치랄롱꼰(라마 10세) 태국 국왕.

FT에 따르면 와치랄롱꼰 국왕은 자신이 왕실 재산을 완전히 통제하기 위해 집권 직후 왕실 재산 관련법을 70년 만에 정비했다. 2018년 개정한 새 왕실 자산 구조법에는 "왕실의 모든 자산은 국왕에게 귀속되며 귀속 자산은 국가가 출연한 자산과 국왕 개인이 벌어들인 자산과 금융 수익을 포함한다"고 규정한다.

이전에는 태국 정부가 CPB 이사회 의장을 임명하는 방식으로 왕실 자산 관리에 형식적으로나마 개입해 왔지만, 2018년 이후 왕실 자산을 국왕 마음대로 사고 팔수 있게 된 셈이다.

타나톤 전 대표는 FT와 인터뷰에서 "올해 태국 경제성장률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잘해야 마이너스 8%가 될 상황인데, 왕실은 경제 회복에 쓸 돈으로 사치를 부리고 있다"며 "2021년 왕실에 투입되는 예산이 2018년 두 배 규모인 89억바트(약 3304억)에 달하는데도 왕실은 국민과 의회에 세부 내역을 공개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태국 야당은 국민들 사이에서 반발 여론이 거세지자 지난달부터 의회 예산위원회 차원에서 왕실 지출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조사 결과, 익히 비행기 애호가로 알려진 와치랄롱꼰 국왕은 미국 보잉 항공기 4대, 프랑스 에어버스 항공기 3대, 러시아산 수호이 항공기 3대, 노스럽 F5-E 제트기 4대, 헬리콥터 21대를 소유한 것으로 밝혀졌다. 다음 달에 취항하는 3대를 포함하면 왕실 소유 비행기가 모두 38대에 달한다.

FT에 따르면 항공기 구입비를 제외하고 연료비, 유지 보수비에만 1년에 20억바트(약 750억원)에 달하는 국가 예산이 배정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왕실 한 해 예산 90억바트(약 3400억원) 20% 이상이 국왕의 비행기 취미 유지에 뿌려지는 것이다.

태국 반정부 시위 집회 주최 측은 14일 오후 방콕 시내 민주주의 기념탑에서 또 다른 대규모 집회를 예고한 상태다. 지난해 12월 수천명에 불과했던 시위 규모는 올해 8월에 1만명을 돌파했고, 지난달에는 5만명을 기록한 것으로 추산된다.

방콕포스트는 "이날 시위대가 이번 집회에서 서거 4주기를 맞이한 푸미폰 전 국왕에 대한 추모와 함께 와치랄롱꼰 현 국왕의 권력 제한, 투명한 왕실 예산 집행을 요구할 예정"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