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그룹은 14일 화상회의 방식으로 이사회를 열고 정의선 수석부회장을 회장으로 선임했다.

정 수석부회장은 지난 3월 현대자동차 이사회 의장을 맡았다. 당초 사외이사가 이사회 의장을 맡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있었지만, 코로나19 확산으로 글로벌 경제 상황이 악화하자 책임 경영을 위해 의장직을 맡았다. 6개월 만에 회장이 되면서 현대차의 운전대를 정 신임 회장이 직접 잡는 모양새가 됐다.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수석부회장은 14일 이사회에서 회장으로 선임됐다.

정 신임 회장은 지난 2018년부터 그룹 경영을 총괄하고 있었다. 그가 회장직을 맡더라도 그룹 경영의 ‘실질’이 크게 변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전면에 나선 것은 자동차 산업이 탈(脫)내연기관 및 IT기술과의 융합으로 격변기를 맞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독일과 일본의 선두 업체를 맹렬히 추격해왔던 현대차 입장에서, 이는 도약의 기회도 될 수 있지만 한 편으로 생존까지 걱정해야 하는 위기일 수도 있다. 뚝심 있게 조직의 변화를 이끌어나가기 위해서는 대주주인 정 신임 회장이 명확히 현대차와 기아차의 운전대를 잡는 것이 최선이다.

◇현장 경영으로 변화 이끈다

정 회장은 대기업집단 3세 경영자 중에서 가장 현장 경영을 강조하는 사람이다. 정 회장은 그동안 승진하면서 현장 경영 보폭을 늘려왔다. 또 자동차 자체를 좋아하고, 제품의 혁신을 최우선시 하는 ‘카 가이(car guy·자동차에 푹 빠진 사람)’이기도 하다. 재무 실적에 연연하는 이른바 ‘빈 카운터스(bean counters·콩을 세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현장을 경시하는 재무 전문가를 뜻함)’는 아니다. 정 회장이 재계나 자동차업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난 2015년 체코 공장에서 체코 총리를 안내하는 정의선 회장(앞줄 맨 오른쪽). 체코 공장은 그가 직접 책임을 맡아 개설한 해외 공장 가운데 하나다.

실제로 정 회장은 1990년대 후반 미국 샌프란시스코대 유학 시절 일반 차량으로 달리는 ‘짐카나’ 경기에 아마추어 선수로 참가했을 정도로 자동차 운전을 즐긴다. 2001년 현대차가 ‘투스카니’를 내놓았을 때엔 경기도 용인 에버랜드 스피드웨이에서 벌인 투스카니 레이싱 행사에 참석해 직접 시승하기도 했다. 현대차가 고성능 자동차 개발과 월드랠리챔피언십(WRC) 등 모터스포츠에 투자를 아끼지 않는 것은 사업적인 고려뿐만 아니라 자동차에 대한 남다른 사랑에서 비롯됐다는 현대차 안팎의 설명이다.

정 회장은 국내 오너 경영자 가운데 가장 해외 출장이 잦은 사람 가운데 하나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가 발생하기 전 그는 한 달에 한 번 이상 해외 현장을 방문했다. 주요 오토쇼는 물론, 세계 최대 가전박람회인 미국 소비자가전쇼(CES) 등에도 빠짐없이 참석하면서 글로벌 산업 동향을 살핀다. 국내에서도 울산공장을 비롯해 국내 공장과 연구소를 자주 찾는다. 이 때문에 현대차 전용기는 국내 기업이 보유한 전용기 가운데 가장 자주 운행된다.

오토쇼 등 현대차 주요 임원이 나서서 사업이나 제품에 대해 설명해야 할 때 정 회장이 직접 나서는 경우도 잦다. 오너 경영자가 전면에 나설 경우 제품에 대한 이미지와 회사 신뢰도가 높아지지만, 자칫하면 오너 경영자에게 실패의 책임이 씌워지는 리스크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 회장은 본인이 중요하다고 판단하는 행사는 직접 참석한다. 지난 2019년 11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현대차의 미래 기술 포럼 '모빌리티 이노베이터스 포럼(MIF) 2019'에 기조연설을 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 행사는 현대차의 해외 혁신 거점인 크래들(Cradle)이 개최하는 비공개 행사였다. 당시 행사에서 정 회장은 기조연설을 했을 뿐만 아니라 5시간 동안 진행된 행사에 계속 앉아서 글로벌 모빌리티 산업 현장의 목소리를 들었다. 또 고성능 전기차 업체 리막의 창업자 마테 리막, 차량 공유업체 그랩의 공동창업자 후이링 탄, 함께 앉아 귓속말로 의견을 주고받았다.

지난 2018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소비자가전쇼(CES)에서 정의선 현대차 회장이 다른 회사 전시물을 살펴보고 있다.

이러한 현장 중심주의는 할아버지 고(故) 정주영 창업주, 아버지 정몽구 명예회장이 모두 강조했던 경영방식이다. 정몽구 명예회장은 "‘현장에서 보고 배우고, 현장에서 느끼고, 현장에서 해결한 뒤 확인까지 한다’는 삼현주의(三現主義) 실천이 현장 경영의 요체"라고 말했다. 이를 이어받은 정의선 회장은 간부 직원들이 현장 파악을 게을리하거나 품질 관리에 소홀하면 불호령을 넘어 즉각 인사조치도 마다하지 않는다.

◇"공무원처럼 일하지 마라" 혁신 가속화…사업 개편 관심

재계에서는 정 회장이 회장 직위에 오르는 데 시간이 걸리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많았다. 이사회 의장을 맡으면서 실질적인 권한은 모두 갖게 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지배구조 개편이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정 회장이 ‘오너 경영자’가 되면 다음 수순이 될 기업지배구조 개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자연스레 현대차를 겨냥한 공격이 늘어날 터였기 때문이다.

크로아티아의 고성능 전기차 개발 회사 리막(RIMAC)을 방문한 정의선 현대자동차 회장(왼쪽에서 두 번째)이 마테 리막 리막 사장(왼쪽에서 네 번째)으로부터 설명을 듣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석부회장(정의선)’이 회장 직위를 갖는 게 낮다고 판단을 내린 것에는 현대차 안에 깔린 위기감이 있다. 현대차는 사내 고위 임원급 회의에서 "10~20년 뒤면 현재 10여곳인 글로벌 자동차 기업이 5곳으로 줄어들 것" "삼성, 애플, 구글과 경쟁해야 하는데 7년에 새 차 한 대 만드는 속도로는 어림없다"는 말이 나올만큼 위기감이 팽배하다. 정 회장도 해외 투자와 관련해 담당 부서가 머뭇대다 기회를 놓치자 "공무원처럼 일하지 말라"고 명시적으로 경고하기도 했다. 정 회장이 오늘 취임을 계기로 사업 재편 및 조직 혁신 속도를 높일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정 회장은 지난 1월 신년사에서 "올해를 미래차 분야에서 가시적 성과를 내 시장 리더십을 확보하는 원년으로 삼고자 한다"고 천명했다. 이를 위해 2025년까지 5년간 61조원을 투자하겠다는 목표도 밝혔다. "현대차는 앞으로 자동차 50%, 플라잉카 30%, 로보틱스 20%인 회사가 될 것"이라며 사업 다변화에 나설것이라는 비전도 공개했다.

지난 8월에는 전기차 전용 브랜드인 ‘아이오닉(IONIQ)’을 발표하고, 관련 차량 출시 계획 및 외관도 공개했다. 수소연료전지차의 경우 수소트럭을 세계 최로 상업 생산해 스위스로 수출했다. 모빌리티 서비스, 자율차 등에 대한 투자도 적극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자율주행차에서는 지난해 자동차 전장부품 회사 앱티브와 합작법인을 설립했고, 올해 완전 자율주행에 준하는 ‘레벨4’ 수준의 자율주행 기술을 개발하고 상용화를 추진한다. 완전 자율주행 시스템에 대한 테스트를 진행할 예정이다. 그랩(동남아시아)·올라(인도) 같은 전 세계 주요 공유 모빌리티에 2년간 7500억원이 넘는 금액을 투자했다. 개인용 소형 비행기인 플라잉카 개발도 적극적이다.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가운데)이 2019년 10월 서울 양재동 본사에서 열린 임직원들과의 타운홀 미팅을 마친 후 함께 기념촬영하고 있다.

이러한 미래 사업 진출 및 사업 다각화를 위해서는 조직 구조 개편이 필요하다. 자동차만 잘 만드는 회사에서 벗어나 선도적으로 모빌리티 관련 제품과 서비스를 내놓고, 다른 회사들과 협력하며, 글로벌 유망 스타트업에 투자해야하기 때문이다. 정 회장이 지난 몇 년간 조직 문화 혁신을 강조한 이유다.

그는 "IT기업보다 더 IT기업이 돼야 한다"고 말한다. "일하는 방식에서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게 모든 걸 동원해볼 생각"이라며 "자동차 볼륨(판매량)으로 1000만대, 1100만대 해서 1등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사람들이 가장 오고 싶어 하는 1등 회사가 되는 것이 목표"라고 정 회장은 강조했다. 임직원 직급 간소화, 상무 이하 임원 직급 축소, 공채 폐지, ‘짙은색 양복에 넥타이’였던 복장 규정 자율화 등이 이뤄졌다. 또 고위 임원과 직원이 대면해 직접 소통하는 ‘타운홀 미팅’도 정 회장이 주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