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여파로 최악의 침체기를 보내고 있는 정유업계가 자사 주유소 부지를 활용한 신사업 발굴에 매진하고 있다. 경쟁 상대로 여긴 수소 사업에 뛰어들어 주유소를 종합 에너지 충전소로 탈바꿈하는가 하면, 유통업체와 손잡고 물류 배송과 공유 주차 사업까지 발을 들이는 등 각종 자구책을 쥐어 짜내고 있다.

정제마진(최종 석유제품 가격에서 원유 가격과 수송·운영비 등을 뺀 것) 적자가 이어지고 글로벌 에너지 전환이 가속화하면서 체질 개선을 더는 미룰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코로나 팬데믹 탓에 항공유와 선박 연료 등으로 쓰이는 벙커C유 등의 수요가 작년보다 크게 줄어든 데다 올여름 최장 장마와 코로나 재확산 여파로 휴가철 ‘드라이빙 시즌’ 특수까지 실종되면서 석유제품 판매는 바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왼쪽부터) 주유소를 거점으로 드론 물류 배송에 나선 GS칼텍스와 주유소 내 유휴부지를 활용해 전기자전거 공유 서비스 사업을 시작한 에쓰오일.

14일 정유업계에 따르면 SK에너지, GS칼텍스, 에쓰오일, 현대오일뱅크 등 정유 4사는 일제히 주유소 인프라를 활용한 수소 충전 사업을 추진 중이다. 이들은 현대자동차와 함께 수소 트럭과 버스 등 상용차 충전 인프라 관련 특수목적법인 설립을 검토하고 있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정유사들 또한 정제과정에서 수소 생산이 가능하기 때문에 매력적인 미래 먹거리로 보고 있다"면서도 "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에너지 주도권을 내줄 수 있는 데다 수소 충전기 설치 등 설비 투자에 대한 부담 때문에 그동안 속도를 내지 못했던 것"이라고 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정부의 수소경제 활성화 정책에 따라 수소 충전 시설을 확대해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유업계에 따르면 기존 주유소 부지에 수소 충전 설비를 들이는 데는 평균 20억원이 소요된다.

GS칼텍스는 지난 5월 처음으로 서울 강동구에 있는 주유소를 ‘융복합에너지스테이션’으로 전환하고 수소 충전 사업을 시작했다. GS칼텍스 관계자는 "하루 평균 수소차 50대가량이 충전을 하러 온다"고 했다. SK에너지도 경기도 평택시에 오는 11월 가동 예정인 수소 충전소를 구축하고 있다. 에쓰오일은 마곡 연구소 부지에 수소 충전소 설립을 검토 중이며, 현대오일뱅크 역시 주유소를 활용해 2025년까지 수소충전소를 80곳까지 확대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GS칼텍스가 계획하고 있는 미래형 주유소.

정유사들은 이외에도 주유소 내 유휴부지를 활용한 수익 창출에 집중하고 있다. 물류 플랫폼으로 주유소 부지를 제공하거나 주차난이 심각한 지역 근방 주유소에 공유 주차 서비스를 도입하는 식이다. 현대오일뱅크는 온라인 쇼핑몰 쿠팡과 손잡고 주유소 22곳을 ‘로켓배송’ 거점으로 활용하고 있다. 주유소 부지를 제공한 대가로 임대 수익을 얻는 방식이며 내년 상반기 로켓배송 거점 주유소를 50곳 이상 늘릴 계획이다. 주유소는 물류 차량의 진입이 용이하고 물건 적재 공간이 충분한 데다 전국에 분포하고 있어 물류 거점화에 적합하다.

주유소에 사물인터넷(IoT)을 기반으로 한 공유 주차 서비스도 등장했다. 현대오일뱅크는 주유소 부지 일부를 주차 공간으로 만들어 수익을 내고 있다. 고객들이 모바일 앱을 통해 빈 공간을 실시간 확인한 뒤 주차를 할 수 있게끔 한 것이다. 이외에도 현대오일뱅크는 기계식 세차가 아닌 손 세차와 출장 세차 등 고급 세차 시장 공략에 나섰다. 지난달부터는 고객 차량을 수령해 세차 서비스를 제공하고 다시 고객에게 반납하는 프리미엄 픽업 서비스도 일부 주유소에 도입했다. 주유소 상당수가 도심 내 요지에 있어 고가 자동차가 많이 방문한다는 점에 착안한 신(新) 차량관리 사업이다.

GS칼텍스는 주유소를 드론 배송 거점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GS리테일과 협력해 GS25 편의점 상품을 드론이 근처 주유소에 적재해 목적지에 배달하는 방식이다. 기존 유통 인프라에 접근이 어려운 도서지역에 생활 물품과 구호 물품을 신속히 배송할 수 있게 돼 물류 사각지대의 주민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고 GS칼텍스는 설명했다.

에쓰오일은 주유소에서 공유 전기자전거 대여 서비스를 시작했다. 지난 8월부터 공유 전기자전거업체 일레클과 제휴해 주유소 유휴 공간에 전기자전거를 주차하거나 대여, 반납하는 사업을 운영하고 있다. 에쓰오일 관계자는 "퍼스널 모빌리티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만큼 주유소 기반 상생 비즈니스 생태계를 조성해 나가는 게 중요해졌다"고 말했다.

정유업계가 적자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생존을 위한 자구책 마련 행보는 가속화할 것으로 보인다. 대한석유협회 관계자는 "국내 정유사의 정제마진만 따지면 2분기보다 3분기가 더 좋지 않은 상황"이라며 "모빌리티 연료가 기름을 넘어 전기와 수소 등으로 다변화됨에 따라 기존의 주유소가 탈바꿈하는 것도 정해진 수순이 됐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