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우리말 지킴이’뿐만 아니라 ‘나라 지킴이’였다. 죽기 전에 아버지의 행적이라도 찾고 싶다."

일제강점기 당시 우리말과 글을 지킨 조선어학회 학자들을 무료로 변론한 박원삼 변호사의 장녀 박양덕(89)씨는 지난 8일 조선비즈와의 전화통화에서 이같이 호소했다. 그는 "아버지는 나라를 위해 평생을 헌신했지만, 1950년 북한에 납치된 후로는 생사를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어학회 변호인 박원삼 변호사.

박원삼 변호사는 지난 2014년 ‘우리말 지킴이’로 재조명된 인물이다. 지난 8일 한글학회에 따르면 1903년 태어난 박 변호사는 일제강점기 ‘조선어학회’의 변호인이었다. 조선어학회는 1931년 우리말과 글을 연구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다. 지난해 개봉한 영화 ‘말모이’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1942년 10월. 조선어 교육을 단계적으로 폐지하던 일제는 당시 조선어사전 편찬 작업을 하던 조선어학회에 들이닥쳐 회원 30여명을 체포했다. 혐의는 ‘내란죄’였다. 이 가운데 12명은 재판으로 넘겨졌다. 이후 9차례에 걸친 함흥지방법원 재판에서 박 변호사는 한격만, 유태설, 나가시마 등 변호사와 함께 조선어학회 회원들을 위해 무료 변론에 나섰다.

한글학자 외솔 최현배 선생의 변론을 주로 맡은 박 변호사는 최 선생의 가족이 함흥형무소에 면회를 올 때마다 자신의 집 한 켠을 내주었고, 해방 이후 최 선생이 출옥하자 자신의 집에서 손수 잔치를 열어주기도 한 것으로 전해졌다.

박양덕씨는 "아버지는 조선어학회 뿐 아니라, 우리말을 썼다는 이유로 잡혀간 조선 학생들을 위해서도 힘썼다"며 "학생의 부모들이 감사하다며 달걀과 닭을 지푸라기에 싼 채로 한아름 가져오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1945년 해방 이후에도 박 변호사는 이들과 연을 이어갔다. 한글학회(조선어학회의 후신)가 당시 입주해있던 서올 종로구 건물은 친일파 이종회가 소유한 자산이었는데, 이종회가 돌연 "건물을 비우라"며 학회를 검찰에 고소한 것이다. 박 변호사는 학회를 지키기 위해 변론에 나섰고 그 덕분에 학회는 을지로 건물로 이전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법조계에서 한글을 지키는데 헌신했던 박 변호사는 1950년 7월 14일 이후로 행방을 알 수 없는 상태다. 유족 측은 납북을 주장하고 있지만 북한은 "정치적 음모"라며 전면 부인했다.

지난 6월 25일 유엔(UN) 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 산하 강제실종실무그룹(WGEID)이 공개한 서한의 일부.

유엔(UN) 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 산하 강제실종실무그룹(WGEID)은 지난 2016년 사단법인 물망초(이사장 박선영)로부터 ‘박원삼 변호사 납북 사건’의 진상을 밝혀달라는 내용의 진정서를 접수 받아 해당 사건을 조사했다.

지난 7일 조선비즈가 입수한 WGEID 서한에 따르면, 박 변호사는 6.25 전쟁 발발 19일 만인 1950년 7월 14일 서울 중구 을지로 자택에서 북한 보위부 요원에 의해 납치된 것으로 조사됐다. 당시 나이 47세였다.

서한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보위부 요원들은 그를 검은 세단에 태워 납치했다"며 "그는 같은 날 평양 을밀대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됐고 이후 행방은 알려진 바 없다"는 내용이 담겼다.

이같은 조사 내용에 대해 북한 측은 지난해 11월 "북한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일"이라고 답변한 것으로 확인됐다. 통상 진정서가 접수되면 WGEID는 사실 관계 조사 후 해당 국가에 혐의 서한을 보내 제기된 혐의에 대한 설명을 요구한다.

WGEID가 공개한 북한 측 답변 서한에는 "혐의서한 내용을 검토한 결과 우리와 관련이 없는 것으로 결론 내렸다"며 "송부 받은 서한의 내용은 근거가 없으며 기본적인 정확성이 결여돼있다"고 쓰였다. 이어 "이는 적대 세력에 의한 전형적인 정치적 음모"라며 "인권을 가장한 사악한 공작에 불과하다"고 적혔다.

유족들은 박 변호사가 분명히 납북됐다는 입장이다. 박양덕씨는 "납북 당시 길가에서 아버지를 검은 세단에 태워 가는 걸 봤다는 목격자가 있었다"며 "이후에는 북한 자강도에서 가정을 꾸렸다는 소문을 40여년 전에 들었다. 북한의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훌륭하셨던 아버지의 생전 흔적을 조금이라도 찾을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