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수 문화전문기자

엄정화, 이효리, 제시, 화사라는 희대의 언니들을 모아 프로젝트 그룹 ‘환불원정대’를 꾸린 제작자 지미유(유재석 분, MBC ‘놀면 뭐하니’)가 송은이를 만났던 장면이 선명하다. 짧은 시간이지만 예능인 송은이가 아닌 CEO 송은이(유튜브 콘텐츠 제작사 ‘비보’와 매니지먼트사 ‘시소’의 대표)의 기세는 예사롭지 않았다. “이분들 ‘환불원정대’로 어렵게 모셨다”며 엄살떠는 지미유에게 송사장은 웃으며 직언한다.

"왜 '이분들'이라고 하지? 같은 동료로서 동등한 입장에서 봐야지, 벌써 무릎을 꿇고 받드는 모양새네. 이제는 같이 가야 한다." "대표가 할 일이 진짜 많아. 전화 받아야 하고 설거지, 화장실 청소, 뮤직비디오 장소 섭외도 해야 돼. 그것도 다 돈이거든." "(사장으로)내가 거둬야 할 아픈 손가락이 있어, 유재석이라고(웃음)."

MBC ‘놀면 뭐 하니'에서 프로젝트 그룹 ‘환불원정대’로 만난 가수 이효리와 엄정화. 앞으로 ‘기 센 여자'란 ‘기세 좋게 호의를 베푸는 여자'로 바꿔불러야 하지 않을까.

송은이는 업계에서 ‘바지사장’으로 유명하다. 일명 Pants CEO. ‘바지를 즐겨 입는다’는 의미로 소속사 직원인 안영미, 신봉선, 김신영이 장난스럽게 붙인 별명이다. 김신영은 사장 송은이에 대해 묻는 이영자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꿈을 현실로 만들어 주는 사람"이라고.

김신영의 부캐인 트로트 가수 둘째 이모 김다비의 히트곡 ‘주라주라'는 송사장에게 바치는 헌정곡이다. ‘야근할 생각은 마이소, 바지 핏이 참 잘 어울려요... 입 닫고 지갑 한번 열어주라. 회식 올 생각은 말아주라… 가족이라 하지 마이소, 내 가족은 집에 있어요.’

2018년 결성한 걸그룹 ‘셀렙파이브'의 멤버 김신영, 안영미, 송은이, 신봉선.

할 말 다 하면서도 다치지 않는 사이. 역할은 있고 서열은 없는 사이. 꿍꿍이는 없고 끈끈함은 있는 사이. 언니들의 세상에서 보스는 거드름 피우다 판돈만 챙겨가는 포식자가 아니다. 언니가 ‘나잇값'을 밑천으로 판을 벌이면, 동생들은 폐 끼치지 않도록 신나게 제 ‘몸값'을 나눠 한다.

같이 가는 동료, 궂은일 하는 대표, 이야기를 들어주고 꿈을 현실화시켜주는 제작자, 송 사장의 지혜를 전수받은 지미유의 ‘환불원정대'는 어떨까. 이효리가 던지고 김태호PD가 받은 이 프로젝트는 한편으론 고맙고 한편으론 아쉽다. ‘물건값을 환불하려고 뭉쳤다'는 ‘환불원정대'라는 팀이름은 사실 난센스다. ‘기 센 언니들이 한자리에 모이면 얼마나 무서울까'라는 기본 포맷은 10년 전, 내가 출연했던 페이크 다큐멘터리 영화 ‘여배우들'의 질문에서 멈춰 있다.

"그러니까 쫓겨났지!" 염장을 지르는 최지우의 말에 고현정이 머리채를 휘어잡고 싸우는 영화 '여배우들'의 하이라이트는, 기 센 여배우를 저렴하게 소비하고 싶어 하는 대중을 고려해 고현정이 통 크게 제안한 페이크였다. 당시 고현정과 윤여정은 (이재용 감독과 함께)판을 벌인 언니들답게, 나이스하게 '망가지며' 제 몸값을 해냈다. 샴페인으로 범벅된 여배우들의 담화는, '부르는 데가 없다'던 김민희의 탄식부터 '나이 들어서도 여자이고 싶다'던 이미숙의 욕망까지… 자기 패를 감추지 않은 채 서로를 끌어안는 솔직함으로 빛났다.

2009년 스스로를 풍자한 페이크 다큐 영화 ‘여배우들'로 한자리에 모인 그들. 최지우, 김민희, 이미숙, 고현정, 윤여정, 김옥빈.

때때로 촬영장을 찾아온 후배 탤런트들에게 ‘출연료를 떼이지 않는 법'을 야무지게 조언하던 60대의 윤여정이 생각난다. 그때나 지금이나 언니들은 어거지로 ‘환불해 달라’고 떼쓰는 패거리가 아니다. 다만 누군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모른 체 하지 않고 자기 기운을 나눠줄 뿐.

그런 관점에서 KBS 예능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는 볼수록 흐뭇하다. 남해에 내려가서 사는 박원숙을 중심으로 김영란, 혜은이, 문숙이 뭉쳐 ‘노년의 큰 그림'을 그려주는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나는 여러 번 울컥했다. 전 남편이 진 빚을 받으러 분장실로 찾아온 깡패들 앞에서도 묵묵히 도시락을 까먹으며 연기했다던 박원숙은, 빠듯한 형편에도 ‘한 지붕 세 가족'으로 인연을 맺은 순돌이(이건주)를 아들처럼 건사하고 용돈을 보냈다.

이혼한 전남편의 천문학적인 빚을 갚기 위해 소극장 공연을 뛰는 혜은이는, 힘들 때마다 박원숙의 품속을 어린아이처럼 파고든다. 혜은이의 무대에 기꺼이 고무신 신고 훌라춤을 춰주는 문숙은 여전히 신비로우며, ‘침대는 내 차지’라고 욕심을 부려도 때마다 어설픈 끼니를 차려내는 김영란은 바지런하고 위트있다. 평균 연령 68세, 누군가의 어머니 혹은 할머니로 우리가 기대하는 ‘가족의 정상성'에서 벗어난 그들은, ‘언니'와 ‘친구’로 모여 제 ‘나잇값' ‘몸값’을 해내며 조화로운 개인으로 익어 간다.

함께 살며 유쾌하게 나이드는 노년 여성을 보여주는 KBS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

기 센 언니들의 디폴트는 ‘환불'이 아니라 ‘환대'다. 더 크고 깊은 공감의 울림통을 갖고 태어난 그녀들은 타자의 형편을 헤아려 큰 목소리로 불러주고 부지런히 자리를 내준다. ‘환불원정대'가 처음 모였을 때 엄정화가 이효리에게 쑥스럽게 속삭이던 말, "효리야, 불러줘서 너무 고마워"가 기억난다. 이 프로젝트에서 가장 소박하게 스쳐 지나가는 ‘환대’의 명장면이다.

송은이가 재능은 있지만 설 자리가 없는 여자 예능인들을 불러 같이 일하고, 박원숙이 남해의 전원주택으로 근사한 싱글의 노년 여성들을 불러 같이 살고, 박세리가 ‘노는 언니들(E채널)'로 체육인 동생들(펜싱 남현희, 피겨스케이팅 곽민정, 수영 정유인 등)을 불러 같이 놀듯, ‘새로운 시도를 할 때마다 정화 언니를 생각하며 힘을 냈다던’ 이효리는 ‘언니의 핏줄'로 한 시대를 풍미한 아이콘 엄정화를 무대로 불러냈다.

‘포이즌' ‘배반의 장미'를 넘어 여전히 댄싱퀸으로 노래하고 싶은 큰언니의 존재값을 기어이 대중 앞에 환불해내며. 어쩌면 그 뒤의 이야기는 덤이다.

꼰대 없는 수평 사회가 오고 있다. 나이스하게 ‘나잇값’ 하는 성인들의 세상. “불러줘서 고마운” 언니들이 기세좋게 목청을 높인다. 맑고 명랑한 환대의 메아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