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 배터리가 황금알을 낳는 산업으로 떠오르면서 전세계에서 배터리 제조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기존 에너지 업체뿐 아니라 자동차 기업들을 비롯해 그간 배터리에 관심을 보이지 않던 화학업체들도 배터리를 직접 만들겠다고 나서면서 협력업체가 경쟁 관계로 돌변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5일 업계에 따르면, 현재 세계 배터리 시장은 한국과 중국, 일본이 선도하고 있다. 올해 1~7월 전세계 전기차 배터리 사용량 1위를 기록한 LG화학을 선두로 중국 CATL와 일본 파나소닉이 치열한 점유율 경쟁을 벌이는 상황이다. 전기차 수요 증가에 따라 배터리 시장이 성장성이 보장된 미래 먹거리로 부상하면서 업계에서는 "배터리 사업을 두고 벌이는 피튀기는 전쟁의 서막이 올랐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 배터리, 전기차 가격의 40%... 자체 생산 유인 커

외부로부터 전기차 배터리를 공급받아 온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은 앞다퉈 자체 배터리 개발에 뛰어들고 있다. 배터리는 전기차 가격의 약 40%를 차지하는 핵심 부품이기 때문에 완성차 업체로서는 수익성 극대화를 위해서라도 배터리 단가를 낮춰야 한다.

전기차 공룡으로 불리는 테슬라가 대표적인 사례다. 테슬라는 지난 22일(현지 시각) 배터리 개발 성과를 발표하는 ‘배터리데이’ 행사에서 제조공정 고도화를 통해 향후 3년 이내에 배터리 원가를 56% 낮추고 2만5000달러(약 2900만원)짜리 전기차를 내놓겠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내후년까지 100GWh(기가와트시), 2030년까지 3TWh(테라와트시) 규모의 배터리셀 자체 생산 공장을 가동할 예정이다. 100기가와트시는 LG화학(051910)의 올해 목표 생산량에 해당하는 규모다.

배터리 내재화를 위한 구체적인 로드맵을 내놓은 테슬라는 그간 중국 CATL, 일본 파나소닉 등과 함께 차세대 배터리를 연구하며 배터리시스템을 생산해왔다. 하지만 배터리시스템의 기본 요소인 배터리셀은 아직까지 LG화학을 비롯해 CATL과 파나소닉 등에서 공급받고 있다. 업계는 이번 테슬라의 배터리셀 자체 생산 선언으로 이들의 거래처 관계가 오래가지 않을 수도 있다고 내다보고 있다.

국내 배터리 업체 관계자는 "납품하던 회사와도 경쟁을 해야 하는 상황이 생각보다 빨리 왔다"며 "단기적으로는 테슬라가 사실상 배터리 공급사에 가격을 낮추라는 신호를 보낸 셈이기 때문에 공급업체들의 경쟁은 심화할 수밖에 없으며 중장기적으로 보더라도 한국 배터리 업계에 큰 위협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테슬라 CEO 일론 머스크는 지난 22일(현지 시각) 배터리데이 행사에서 수년 내 배터리 원가를 56% 낮추고 배터리셀을 자체 생산하겠다고 밝혔다.

유럽과 미국에서도 배터리 자급자족에 속도를 내고 있다. 독일 폭스바겐은 2030년까지 전기차 2200만대를 생산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스웨덴 배터리 업체 노스볼트와 전기차용 리튬이온 배터리 공장 건설을 위한 합작법인을 설립하기로 했다. 최근에는 중국 3위 배터리 제조사인 궈쉬안 지분의 26.5%를 인수하는 등 배터리 기술 확보에 주력하고 있다.

현재 삼성SDI의 배터리를 사용하는 독일 BMW는 지난해 LA오토쇼에서 "배터리 개발 기술을 내재화하고 BMW 전기차에 최적화된 배터리를 직접 개발하겠다"고 발표했다. 지난해 11월에는 배터리 연구소 ‘배터리셀 역량 센터’를 열고 배터리셀 연구에 돌입했으며, 2022년 가동을 목표로 독일 뭔헨 인근에 배터리셀을 생산하는 1만4000㎡ 규모의 파일럿 공장도 짓기로 했다.

◇ "석유화학 사업은 미래 없어" 전통 화학업체들도 군침

전기차 배터리 사업에 관심을 보이지 않던 전통 화학 업체들도 잇따라 배터리 산업에 진출하고 있다. 롯데그룹은 지난 23일 전기차 배터리 핵심 소재인 동박을 제조하는 두산솔루스 인수 펀드에 3000억원을 출자한다고 밝혔다. 롯데그룹의 주력 계열사 롯데케미칼은 배터리 소재 분야 진출을 검토하고 있고, 롯데알미늄은 지난 2월부터 헝가리에 1100억원을 투자해 배터리 양극박 생산 공장을 짓고 있다. 롯데 관계자는 "환경 이슈에 영향을 많이 받는 석유화학 사업은 장기적으로 볼 때 성장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내부 시각이 있다"며 "배터리 사업 등 구조적인 사업 전환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고 했다.

지난해 11월 문을 연 BMW 배터리 연구소 ‘배터리 셀 역량 센터’ 내부 모습

세계 최대 화학업체인 바스프 역시 전기차 배터리 핵심 소재인 양극재와 전해질 시장에 진출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바스프는 "화학업체의 장점을 살려 리튬이온전지를 비롯, 레독스플로우전지(RFB) 등 미래 배터리 소재 시장을 선점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 각국 전기차 보조금 투입 등 경쟁 치열… "절대 강자 없어"

유럽연합(EU)을 비롯한 세계 각국이 전기차 배터리 산업에 보조금을 대거 투입하고 있어 배터리 업체 간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질 전망이다. 이에 따라 5년 내 배터리 공급과잉이 나타날 것이라는 예측도 나오고 있다.

현재까지 세계 배터리 시장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는 한국 배터리 업체들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국내 배터리 업계 관계자는 "수많은 업체들이 엎치락뒤치락하는 배터리 시장 특성상 국내 업체들도 언제 중국과 유럽 등에 따라잡힐지 모른다"며 "어렵게 구축해놓은 거래처 파이를 결국 여러 경쟁 업체와 나누다 보니 절대 강자가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실제 테슬라에 원통형 배터리를 수년간 전량 공급하며 전세계 배터리 점유율 1위를 달리던 파나소닉은 LG화학·CATL과 파이를 나누면서 3위까지 내려갔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완성차 업체들의 배터리 내재화가 당장은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말도 있지만 2년 뒤에는 배터리 시장이 어떻게 재편돼 있을지 알 수 없다"며 "지금 선두를 달리고 있더라도 긴장의 끈을 늦춰선 안 된다고 내부에서도 자주 언급하고 있다"고 말했다. 시장조사업체 SNE리서치는 "한국 배터리 3사가 향후 글로벌 시장 주도권을 확실히 확보하려면 시장 흐름을 면밀히 관찰하면서 기초 경쟁력을 배양하고 적절한 성장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