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시된 지 2년 가까이 된 차인데, 주문하면 3달은 기다려야 한다구요?"

추석 연휴가 지난 뒤 준대형 SUV 팰리세이드로 차를 바꾸려고 인근 현대자동차대리점을 방문한 김모(38)씨는 지금 계약서를 써도 3달 후에나 제품을 받아볼 수 있다는 설명에 깜짝 놀랐다. 차대에 2021년식으로 표시돼 큰 문제가 없다지만, 2020년에 주문한 차를 사실상 내년에나 받아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조금 ‘급’을 올려 제네시스 GV80이나 G80 같은 차를 사려해도 대기 기간이 역시 3개월 가량이었다. 그나마 1달 조금 넘게 기다리면 되는 준대형 세단 그랜저 정도가 사정이 나았다. "아무리 인기가 많은 차종이라지만 출시된 지 2년 정도된 차를 3개월 이상 기다려야하는 건 문제가 있는 거 같다"고 김씨는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현대차 울산 4공장 직원들이 팰리세이드를 검수하고 있다.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가 지난해 4분기부터 전략 차종 내지는 주요 차종 대규모 변경 모델을 잇따라 내놓으면서 소비자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 그런데 경쟁력 있는 신차 생산이 수요를 못따라가 대기 수요가 월 생산 능력의 몇 배가 되는 현상이 이어지고 있다. 국내 공장의 차량 생산 방식이 경직적이라 차종 변경이나 다품종 생산이 어렵기 때문이다. 고임금 만큼이나 안정적인 일감 확보에 전투적인 현대·기아차 노조 문제를 지적하는 의견도 나온다.

자동차 업계에 따르면 9월 말 현재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의 주요 차종 가운데 다수가 대기 수요가 3달치 생산량에 달한다. 가장 대표적인 게 준대형 SUV 팰리세이드다. 2018년 말 출시한 팰리세이드는 주문하면 6개월이 넘게 기다려야 제품을 인도받을 수 있을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런데 출시된지 1년 10개월째를 맞은 현재에도 대기 수요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다. 4개월 정도 기다려야 했던 게 최근 3개월로 단축된 정도다.

제네시스의 준대형 세단 G80.

고급차 전용 브랜드 제네시스의 준대형 세단 G80과 준대형 SUV GV80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두 차종 모두 3달은 기다려야하는 상황으로 알려져있다. GV80은 올 1월 처음 출시됐고, G80은 3월 완전변경(풀체인지) 모델이 나왔다.

기아차가 지난 8월 출시한 다목적차(MPV) 카니발의 경우 연말에나 받아볼 수 있는 상황이다. 그나마 9~11인승 디젤 모델만 올해 수령이 가능하지, 7인승 디젤이나 가솔린 모델은 2021년에 받아볼 수 있다.

현대차와 기아차에 대기수요가 몰린 이유는 먼저 최근 크게 늘어난 사전 계약을 들 수 있다. 카니발의 경우 출시 전 사전 계약이 3만2000대에 달하고, 출시 직후 1달도 안돼 8000대가 추가돼 4만대 선을 넘겼다. 현대차가 최근 출시한 투싼도 제품 공개 직후 1만대 사전 계약이 이뤄졌다. 현대차와 기아차가 출시 전 제품 제원, 내외관 디자인, 변경 점 등에 대한 정보를 풍부하게 제공할 뿐만 아니라 동영상, 사진 등 정보를 볼 수 있는 수단도 다양해졌기 때문이다. 최근 자동차 업계는 신차 출시 전 편의 사양이나 안전 기능까지 모두 공개하는 추세다.

또 현대차와 기아차 품질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지면서, 디자인과 편의 사양 등만 보고 계약해도 무리가 없다는 소비자들의 인식도 중요한 배경 가운데 하나다.

현대차 울산공장 근로자들이 차량을 조립하고 있다.

그런데 자동차 업계는 수요 보다 공급 측면 문제를 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한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결국 현대차가 수요 변화에 발맞춰 유연하게 생산 라인별 차종 할당이나 시간당 생산 대수 등을 조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라고 말했다. "펠리세이드의 경우 2019년만해도 수요를 과소(過少) 추정했다는 설명이 가능하지만, 2020년의 대기 수요는 공급을 늘리지 못한 걸로 봐야 한다"고 이 관계자는 말했다.

현대차는 울산 2공장에서 팰리세이드, GV80, 싼타페 등 SUV를 생산하고 또 4공장에서 추가로 팰리세이드를 만드는 데, 다른 공장에서 SUV를 생산하기 어렵다는 게 근본적인 문제로 지적된다. G80의 경우 G70, G90, 투싼, 넥쏘 등과 함께 5공장에서 생산된다. 기아차의 카니발은 광명 소하리 1공장이 맡고 있다. 생산량을 늘리려면 다른 공장으로 일감을 주어야하는 데 불가능하다는 게 자동차 업계의 지적이다.

현대차와 기아차는 국내에서 일괄조립 방식의 다소 낡은 생산 방식을 유지하고 있어, 유연한 차종 변경이 어렵다. 생산방식 변경을 위해서는 노조와 협의를 해야하는 데, 노조 쪽에서 임금보다 더 완강한 것이 생산방식이나 생산량 문제이기 때문이다. 현대차 생산직 근로자 임금의 4분의 1 가량이 특근 등에 따른 초과근로이기 때문에 일감 뿐만 아니라 임금 문제이기도 하다.

시간 당 생산량(UPH)를 조절하거나, 특근 시간을 조절하는 문제도 노조와 단체협상을 통해서 결정해야하는 데 현실적으로 유연하게 바꾸기 어려운 실정으로 알려져있다. 여기에 주 52시간제로 초과근로가 제한되어있다는 제도적인 여건도 증산에 족쇄로 작용한다.

현대차 브라질 공장은 원키트 시스템을 채택해 유연화된 생산 라인을 갖추고 있다.

현대차의 경우 올 7월 생산 라인의 유연화를 위해 차량 한 대 분량의 부품을 실은 키트가 생산라인에서 차체와 함께 이동하는 `원키트(One-kit)` 시스템 도입을 노사 합동 고용안정위원회에서 논의했다. 원키트 시스템을 도입하면 라인 하나에서 10개 이상의 차종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그만큼 근로자의 숙련도를 올려야하고, 지금과 같이 특정 라인에 일감이 몰리는 일이 없어진다. 노동 강도는 높아지고 ‘지대(rent)’로서 특근 수당이 사라지기 때문에 노조의 반발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원키트 시스템 도입은 그 이후 유야무야된 상황으로 알려졌다.

한 자동차 업계 전문가는 "결국 현대차 노조의 전투적 경제주의가 생산 방식의 유연화까지 발목을 잡고 있는 형국"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