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만 일해도 퇴직금 준다고요? 기업은 봉입니까. 이러다 있던 일자리마저 없어집니다."

지난 6월 이수진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 17명이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 개정안을 발의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한국경영자총협회 내 노무상담실에는 영세기업들의 문의가 빗발쳤다. 한 달만 일해도 퇴직금을 받을 수 있다고 해서 ‘한 달 퇴직금법’이라고 불리는 이 법안은 계속근로기간이 1개월 이상인 근로자에게 퇴직금 지급을 의무화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이 법안이 처리될 경우 기업의 추가 퇴직급여 부담액은 6조7092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1년 미만 퇴직자의 약 50%가 30인 미만 사업장에서 나오는데, 퇴직급여 지급 대상 확대에 따른 인건비 부담은 중소·영세사업장과 소상공인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조선DB

다중대표소송제 도입 및 감사위원 분리 선임(상법 개정안), 공정위 전속고발권 폐지(공정거래법 개정안), 금융그룹감독법 도입 등 이른바 ‘공정경제 3법’이라고 불리는 규제 법안에 대한 재계의 우려가 높아지는 가운데, 3법 외에도 수많은 기업 규제 법안이 경쟁적으로 발의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업 측은 기업과 시장을 규제하는 내용이 충분한 검토 없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의되고 있는 데 대해 우려감을 드러내고 있다.

23일 규제 신설·강화 내용을 종합 안내하는 규제정보포털과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21대 국회가 개원한 5월 30일부터 지난 21일까지 발의된 4095건의 법안 중 규제법안은 494건(12.06%)에 달한다. 대한상공회의소는 이 중 284개의 법안이 기업 경영에 부담이 될 것이라고 집계했다. 규제법안의 절반 이상이 기업을 옥죄는 내용인 셈이다.

3법 외에 기업들이 우려하는 법안 중 하나는 지난 6월 강은미 정의당 의원이 발의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다. 이 법안은 사망 등 중대한 인명 피해를 주는 산업재해가 발생했을 때 위험 방지 의무를 다하지 않은 사업주나 경영 책임자를 처벌하고 징벌적 손해배상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 담겼다.

재계에선 이미 유사한 내용의 산업안전보건법이 있는 데다 무조건 경영진에 대한 처벌 수위를 높이는 것이 산업재해를 줄이는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현행 산안법으론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의 경영진을 최고 7년 이하 징역 또는 1억원 이하 벌금에 처할 수 있는데, 강 의원의 법안엔 여기에 3년 이상이라는 처벌 하한선이 들어 있다. 또 2명 이상 사상자가 발생하면 각각의 형기를 합산한다는 조항도 있다. 한 재계 관계자는 "산업재해의 80% 이상이 예산과 인력이 부족한 영세한 사업장에서 발생한다"면서 "처벌보다는 예방·감독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데, ‘3년 이상’을 강제하는 것이 과연 좋은 법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정부가 같은 달 국회에 제출한 노조법 개정안을 두고도 ‘기울어진 법안’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 명분으로 제출한 이 법안은 해고자와 실직자의 기업별 노조 가입 허용, 노조 전임자에 대한 급여지급 금지규정 삭제 등의 내용이 담겼다. 재계는 이 법안과 관련해 해고자·실업자의 기업별 노조 가입을 허용하더라도 사업장 출입은 원칙적으로 금지해야 하고, 파업 시 대체근로를 금지하는 현행 규정도 선진국처럼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제21대 국회 초선의원들이 지난 5월 20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본청 앞 계단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지난 16일엔 코로나19로 직격탄을 맞은 대형 유통업체의 영업과 출점을 기존보다 더 강하게 규제하는 법안이 통과됐다. 대형마트 입점 제한 연장 내용을 담은 ‘유통산업발전법 일부개정법률안’은 전통시장 1㎞ 이내에 앞으로 5년 더 대형마트 입점을 금지하고, 준대규모점포의 의무휴업 및 영업시간 제한 등을 적용하는 내용이 담겼다.

현재 국회에는 이외에도 기업 규제법안이 다수 발의된 상태다. 해외석탄발전 투자금지 법 개정을 담은 한국전력공사법, 지역자원시설세 과세대상을 확대하는 지방세법, 보험사 보유자산 시가평가를 적용하는 보험업법 등이다. 이 중 이른바 ‘삼성생명법’으로 불리는 보험업법 개정이 이뤄지면 계열회사의 주식을 취득원가가 아닌 시가 기준으로 총자산 3% 이상 보유할 수 없게 된다. 삼성생명(032830)이 보유 중인 삼성전자(005930)주식 가운데 상당 부분을 처분해야 하는 등 주요 대기업들은 경영권 방어와 지분 정리 등의 과제를 떠안게 될 전망이다.

소기업에 폭탄이 될 수 있는 법안도 있다. 정부가 내년부터 기업의 사내유보금에 소득세를 부과하는 내용의 세법 개정안이 그것이다. 1인주주나 가족기업(개인유사법인)이 당기순이익의 50%, 혹은 전체 자본금의 10%가 넘는 초과유보소득을 가지고 있으면 이를 배당한 것으로 간주해 미리 배당소득세 14%를 추가로 걷겠다는 내용인데, 상당수 소기업 경영진이 타격을 입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재계 관계자는 "코로나19라는 중대적 위기 상황에 기업 관련 규제를 신설하거나 강화할 때 경영 현장에 미칠 영향을 검토하고 다양한 의견을 토론하는 등 충분히 논의하는 입법풍토를 조성해야 한다"고 했다.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은 지난 21일 긴급 기자간담회를 열고 정치권을 비판했다. 박 회장은 "코로나 사태로 도저히 버티기 어렵다는 기업들의 목소리가 넘쳐나고 있는데 (정치권은) 경제에 눈과 귀를 닫고 자기 정치에 몰두하고 있다"고 했다. 이날 대한상의는 기업경영에 중대한 영향이 예상되는 13개 법안을 선별해 경제계 의견과 대안을 담은 상의리포트를 국회에 제출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