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미조선]
디즈니 최초 여성 애니메이션 시나리오 작가 린다 울버튼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속에서 극장가가 조심스럽게 되살아날 기미를 보인다. 올해 하반기 극장가의 키워드는 ‘여성 히어로’다. 9월 17일 디즈니의 뮬란 개봉을 시작으로 마블스튜디오의 블랙위도우, 워너브라더스의 원더우먼1984가 스크린에 등장할 예정이다. 뮬란은 개봉을 전후해 사회적인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주연 배우 류이페이(유역비)의 홍콩 경찰 옹호 발언, 신장 지역 감사 표현이 문제가 된 것. 그러나 뮬란 캐릭터와 영화가 주는 메시지의 긍정적인 의미마저 정치·사회적인 이유로 비난당해서는 곤란하다. 남성 주인공 일색이었던 영화계에 다양성을 반영하겠다는 반성의 선언과도 같기 때문이다. ‘이코노미조선’ 364호에선 ‘여성 히어로의 시대’를 다뤘다. 니키 카로 뮬란 감독 인터뷰, 디즈니 최초 여성 시나리오 작가 린다 울버튼 감독 인터뷰, 여성 히어로 영화의 역사, 여성 영화인 대담을 담았다. [편집자 주]

린다 울버튼. TV 애니메이션 시리즈 ‘들불(1986)’ 각본, 애니메이션 ‘미녀와 야수(1991)’ ‘라이온킹(1994)’ 각본, 영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2010)’ ‘말레피센트(2014)’ 각본

백설공주, 잠자는 숲속의 공주, 신데렐라…. 디즈니는 납작한 그림으로만 존재했던 동화 속 공주를 살아 움직이는 애니메이션으로 재현해 전 세계 어린이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이 공주들은 왕자님의 입맞춤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여성상에 머물렀다. 디즈니 공주가 진정한 의미의 입체성을 부여받기까진 오랜 세월이 걸렸다.

변화는 1988년부터 서서히 시작됐다. 어린이 TV쇼의 각본을 쓰던 린다 울버튼이 여성 최초 애니메이션 시나리오 작가로 디즈니에 입사한 것. 울버튼의 손을 거친 동화 속 여성 주인공은 주체적인 현대 여성으로 재탄생했다. 애니메이션 ‘미녀와 야수(1991)’의 주인공 벨은 제목처럼 ‘미녀’라는 외적 특징만으론 설명되지 않는, 책과 모험을 좋아하는 여인이다.

디즈니 100년 역사상 최초의 여성 애니메이션 시나리오 작가. 그녀가 디즈니에 안겨준 매출만 약 30억달러(약 3조5000억원)에 달한다. ‘알라딘(1992)’ ‘라이온킹(1994)’ 등 애니메이션뿐 아니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2010)’ ‘말레피센트(2014)’ 등 애니메이션의 실사화 영화 각본 작업에도 참여했다. 9월 17일에는 울버튼이 추가 이야기 구성에 참여한 애니메이션 ‘뮬란(1998)’의 실사판이 개봉한다. 뮬란 개봉을 맞아 9월 8일 울버튼을 국내 최초 서면으로 단독 인터뷰했다.

울버튼은 원작을 각색하는 과정에서 현대상을 반영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녀는 "(디즈니의) 문화 자체를 갑자기 바꾸려 들진 않았다"며 "고전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배경이 과거라도 현시점을 반영해 여성 캐릭터를 재구상할 방법을 끊임없이 탐구한다"고 말했다.

린다 울버튼이 디즈니에서 처음으로 각본을 담당했던 애니메이션 ‘미녀와 야수(1991)’의 한 장면.

디즈니에 어떻게 발을 들였나.
"1988년 다짜고짜 디즈니에 찾아가 안내 데스크에 내가 썼던 청소년용 소설 '바람이 불기 전에 달려라(Running Before the Wind)' 한 권을 내밀었다. 책 속에는 내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은 쪽지를 넣어뒀다. 그 주 주말 놀랍게도 나의 소설을 읽은 디즈니 관계자가 연락을 했고 내게 디즈니에서 함께 일할 것을 제안했다. 꿈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디즈니랜드와 30분 거리에 있는 캘리포니아 롱비치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며 디즈니에 푹 빠져 지냈던 내게는 일생일대의 기회였다. "

1959년생인 린다 울버튼은 1970년대 청소년기를 미국의 제2세대 여성 운동의 조류 속에서 보냈다. 울버튼은 오랜 기간 여성이 영화 속에서 ‘희생자(victim)’로 그려지는 것에 문제의식을 느꼈다. 디즈니 입문 이후 울버튼만의 조용한 개혁이 시작됐다. "나는 독립적이면서도 희생자가 아닌 영웅에 대해 쓰는 것에 매우 흥미를 느꼈다"고 말했다.

1991년 디즈니에서 '미녀와 야수' 각본으로 데뷔했다. 어떤 작업 과정을 거쳤나.
"'미녀와 야수' 각본은 내 꿈이었지만 일생일대의 도전이기도 했다. 1960~70년대 여성 운동 이후 나는 다정하고 수동적인 여성 히어로는 1990년대 우리 문화를 반영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나와 협업했던 작사가 하워드 애시먼과 나는 벨을 좀 더 주체적인 여성으로 그리고 싶었다. 프랑스 동화 속에서 벨은 실종된 아버지가 돌아와서 그녀에게 장미를 건네길 기다리기만 하는 인물이다. 우리 버전에선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는다. 벨이 걱정돼서 직접 아버지를 찾아 나선다. 벨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는 용감하고 도전적인 여성이다."

원작과 다른 캐릭터를 창조하는 일은 큰 도전이었겠다.
"당시 디즈니는 남성 중심적 조직으로 낡은 비전(old school vision)을 계속 추구했다. 나를 지지해주는 그룹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내가 썼던 각본이 수정되는 사건도 있었다. 벨이 자신이 방문하고 싶은 국가를 지도에서 찾아서 핀을 꽂는 장면이 있었다. 모험 지향적이고 호기심 많은 벨의 성격을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스토리보드(영상 속 장면의 초안을 그린 문서)에는 벨이 부엌에서 케이크를 장식하는 장면으로 수정됐더라. 나는 수정 사항에 반발했고, 영화 제작자를 끈질기게 설득했다. 결국 벨이 코를 책에 파묻고 독서하는 장면으로 합의점을 도출했다."

주체적 여성상을 그린 이유가 무엇이었나.
"전 세계 여자아이들에게 디즈니 여자 주인공이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기존에 보지 못했던 방식으로 소녀와 여성을 묘사한다면, 어린 세대는 이를 당연한 전제 조건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걸 알기에 벨을 만드는 작업에 더 큰 책임감을 느꼈다."

디즈니 내에서 입지를 쌓아나간 울버튼은 주체적인 여성을 그려낸 영화 작업에 자주 소환됐다. 디즈니에서 최초 동양인 여전사 애니메이션 ‘뮬란(1998)’을 제작할 당시 울버튼은 추가 이야기 구성 작업에 참여했다.

당신의 손길이 닿았던 벨과 뮬란 사이에 공통점이 있을까.
"벨과 뮬란은 개인을 지나치게 억압하던 문화에 맞선 능동적인 히어로다. 당대 문화는 아마 일부 남성과 일부 여성에겐 매력적일 것이다. 하지만 이 두 여성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 그들은 정해진 방식에 따라 살고 가정적인 지고지순함을 강요받는다. 이는 그들 본연의 모습인 자유를 억압한다. 벨과 뮬란은 아버지를 찾아 나서거나 보호하고자 운명을 스스로 개척한다."

당신은 강한 여성상을 지향하는 것 같다.
"'강한(strong)' 여성 캐릭터라는 표현은 익숙하지만 오랫 동안 들어와서 다소 피로감이 있다. 너무 단편적인 단어로 캐릭터를 설명하려 든다. 강한 여성 캐릭터를 면밀히 분석해보면 주도적으로 행동하면서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다. 이들은 피해자가 아니다. 만일 누군가가 이들에게 피해를 준다면, 이들은 행동으로 직접 문제 해결에 나설 것이다."

울버튼은 ‘강한’이란 표현 대신 여러 가지 방식으로 여성 캐릭터에 수식어를 붙여줘야 한다고 본다. 실제 그가 창조하는 여성 캐릭터는 선과 악, 강과 약이라는 손쉬운 구분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2014년과 2019년에 개봉한 시리즈물 ‘말레피센트’는 동화 ‘잠자는 숲속의 공주’에 등장하는 악역에 집중한다. 울버튼은 사악한 마녀로 그려졌던 단편적인 캐릭터에 서사를 부여한다. 주인공 말레피센트는 본래부터 타락한 악인이 아닌 욕망에 충실한 입체적인 인물로 재탄생한다. 영화는 말레피센트의 시점에서 그가 오로라 공주에게 왜 저주를 내렸는지를 보여준다.

당신은 고전 동화를 리메이크 영화나 후속작으로 재가공해왔다. 여성 캐릭터가 현대상을 반영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은데. 당신이 캐릭터를 재창조하는 과정에서 가지고 있는 철학이 있나.
"이야기와 캐릭터는 창조 당시의 시공간을 반영한다. 이들은 과거를 이해하고 전 인류를 더 나은 미래(a better-for-all-humankind future)로 인도하는 데 유용한 역할을 한다."

앞으로 재창조하고 싶은 캐릭터가 있다면.
"팅커벨을 주인공으로 하는 장편 영화를 써보고 싶다. 팅커벨을 사랑하고, 언제나 강한 유대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더 많은 기사는 이코노미조선에서 볼 수 있습니다.]

[여성 히어로의 시대] ①여성 히어로가 몰려온다

[여성 히어로의 시대] ② 니키 카로 ‘뮬란’ 감독

[여성 히어로의 시대] ③ 디즈니 최초 여성 애니메이션 시나리오 작가 린다 울버튼

[여성 히어로의 시대] ④21세기 디즈니 전성기 이끈 밥 아이거의 철학

[여성 히어로의 시대] ⑤여성 히어로 영화 변천사

[여성 히어로의 시대] 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