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연, 코로나 신약 개발사에 감염동물·실험실 제공
참여 기업들, 비밀유지 협약 맺지만 절반 이상 어겨
"기관 공신력 훼손... 임상성과 발표 성숙한 문화 시급"
서정진 "코로나로 바이오기업 주가 상승 모두 투기"

한국생명공학연구원 본원.

한국생명공학연구원이 주도하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동물 감염모델 실험에 참여한 국내 제약·바이오 기업들의 절반 정도가 검증되지 않은 실험결과를 사전 상의없이 언론 등에 공개한 것으로 드러났다.

생명연 관계자는 11일 코로나19 치료제 개발을 위해 동물 감염모델 실험에 참여한 기업 A사가 완전히 검증되지 않은 동물 실험결과를 사전 상의없이 언론 등을 통해 공개한 일에 대해 최근 항의했다고 밝혔다. 이같은 행동이 생명연의 공신력까지 떨어뜨릴 수 있다고 우려했다.

AI 기반 신약개발 회사 A사는 약물 재창출 모델을 활용해 도출한 코로나19 후보 두 종류 약물을 코로나19 감염 동물 모델에 병용 투여한 결과 렘데시비르 보다 2배 이상 높은 94.3%의 치료율을 보였다고 이달초 발표한 바 있다.

생명연 관계자는 "코로나19 치료제 개발을 위해 동물 감염모델 실험에 참여한 기업의 절반 이상이 협약을 어기고 일방적으로 실험결과를 공개해왔다"고 밝혔다. 전체 참여 기업 수는 밝히지 않았지만 지난 6월부터 매달 2~3개사가 참여했으므로 이날까지 10여개사로 파악된다.

기업들은 실험 참여를 위해 ‘실험결과 공개 전에 생명연과 상의해야 한다’는 일종의 비밀유지 의무 조항을 담은 협약서를 작성하는데 절반이 이를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중과 투자자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내용을 사전에 점검하기 위한 협약이 성급한 홍보를 위해 무용지물이 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서정진 셀트리온(068270)회장이 지난달 20일 정세균 총리가 주관한 제15차 목요대화에서 "코로나19 때문에 바이오 기업들의 주가가 올라가던데, 그것도 다 투기"라고 했을 만큼 코로나19 치료제·백신에 대한 과잉 홍보를 통한 투기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다는 우려가 적지 않다.

A사 관계자는 이날 "상호 소통 과정에서 오해가 있어 계약 조건을 위반한 건 맞다. 앞으로 잘 준수하기로 했다"며 "다만 기업 입장에서는 열흘씩 걸리는 이같은 절차를 만든 취지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공개 내용은 생명연 소속 연구자들이 직접 알려준 실험결과를 토대로 한 만큼 큰 문제가 없는데, 공개 시기를 지연시키는 별도의 절차가 왜 존재하는지 납득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생명연 관계자는 "단 한번의 실험에 대한 결과를 알려주는 것일 뿐, 이것이 과학적으로 완전히 검증된 내용이라고 볼 수는 없다"며 "이를 보완하기 위해 논문으로 발표하거나 생명연과 사전 협의한 내용을 토대로 공개해달라"고 기업들에 당부하고 있다고 전했다. 논문을 투고하면 전세계 전문가들이 검토하는 피어리뷰(peer review·동료평가) 과정을 거쳐 연구결과의 신뢰성을 높일 수 있다. 논문 발표가 여의치 않을 경우엔 적어도 실험을 지원한 생명연과 미리 상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협약을 어기는 관행을 제재할 마땅한 수단이 없다는 것도 문제점으로 꼽힌다. 생명연 관계자는 "기업에 대한 정부의 갑질 행위로 읽힐 수 있어 ‘협약을 어길 경우 생명연이 제공한 실험의 결과를 파기한다’는 식의 구체적인 제재 조항을 넣지는 못하고 있다"며 "‘또 속았구나’하고 넘어갈 뿐"이라고 했다. 위반 기업들에 페널티를 부과하는 방안에 대해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관계자는 "우선 (기업들의 위반) 현황을 파악한 후 검토가 필요한 부분"이라고 했다. 전문가들은 기업 스스로 주가에 연연해 검증이 채 되지 않은 내용을 홍보하기 보다는 검증된 내용을 발표하는 성숙한 문화가 자리잡아야한다고 지적한다.

생명연은 산하 조직인 감염병연구센터를 통해 지난 6월부터 코로나19 치료제·백신 개발사들에게 원숭이 감염모델과 ‘동물이용 생물안전 3등급 연구시설(ABSL-3)’을 지원하고 있다. 이달부터는 기능성바이오소재연구센터를 통해 햄스터와 쥐 감염모델도 제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