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세원법’ 제정 1년 만에 부산의 정신과 전문병원에 입원해 있던 환자가 의사를 공격해 숨지게 한 사건이 또다시 발생했다. 이 때문에 병원 현장에서 의료진의 안전을 강화하겠다는 정부 대책이 실효성이 적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지난해 1월 4일 서울 종로구 적십자병원 장례식장에서 고(故) 임세원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의 발인식이 엄수돼고 있다.

경찰에 따르면 지난 5일 부산의 한 정신과 전문병원에서 60대 남성 A씨가 흉기를 휘둘러 의사 B(50)씨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흉기에 찔린 의사 B씨는 곧장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끝내 숨졌다. A씨는 입원 중 흡연 문제로 퇴원 요구를 받아 병원 측과 지속적인 갈등을 겪어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지난 2018년 고(故) 임세원 교수 사망 사건과 흡사한 사건이다. 2018년 12월 임세원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진료 도중 환자 박모(31)씨가 휘두른 흉기에 숨졌다. 박씨는 당시 조현병을 앓고 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진료현장의 안전을 강화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고 지난해 4월 의료법이 일부 개정돼 이른바 임세원법이 제정됐다. 법 개정 이후 의료진 상해 행위에 대한 처벌은 강화됐지만 유사한 사건들은 끊이지 않았다.

지난해 10월 서울 노원구 한 병원에서 진료 중이던 의사가 50대 남성이 휘두른 흉기에 크게 다쳤고, 지난 6월에는 전북 전주의 한 종합병원에서 한 정신과 의사가 환자에게 머리를 가격당해 중상을 입었다.

이번 부산 의사 사망사건까지 벌어지면서 임세원법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이 다시 증폭되고 있다. 특히 정부가 내놓은 진료환경 개선 방안의 적용 범위가 ‘100병상 이상 병원’에 한정돼 일반 병·의원의 경우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는 지적이 많다. 통상 30병상 미만은 의원급, 30~100병상 미만은 병원급, 그 이상은 종합병원으로 분류된다.

지난해 4월 정부가 발표한 ‘안전한 진료환경 조선 방안’.

지난해 4월 개정된 의료법에 따르면 의료행위 공간에서 사람을 상해 또는 사망에 이르게 한 경우 최대 무기징역에 처할 수 있다. 또한 이들에 대해선 음주로 인한 심신미약 등 형법상 감경규정을 적용하지 않을 수 있다.

법 개정에 맞춰 주무부처인 보건복지부도 경찰청과 함께 제도 개선책을 내놨다. 복지부는 같은달 ‘안전한 진료환경 조성 방안’을 발표하며 의료기관 내 비상벨, 비상문 등 보안설비 설치와 보안인력 배치를 의무화했다. 이들 병원에 대해서 안전관리료가 책정돼 건강보험 수가 지원을 받는다. 이 같은 내용은 지난 4월 시행된 ‘의료법 시행규칙’에도 명시돼 있다.

그러나 적용 대상이 문제가 됐다. 보안 설비·인력 의무 배치 병원이 전체 의료시설 중 일부에 불과한 ‘100병상 이상 병원’으로 한정된 것이다. 6일 행정안전부 ‘한국도시통계’에 따르면 전국 6만6316개 의료기관 중 100병상 이상의 종합병원은 단 343개였고, 일반 병·의원은 총 3만2000여개다.

사각지대에 놓인 소규모 병·의원들은 비용 부담으로 인해 자발적으로 비상벨 등 보안설비를 설치하고 보안인력을 세우기 어려운 형편이다.

소규모 병·의원은 의무 배치 기관이 아닌 탓에 복지부의 재정 지원을 받기 어렵다. 대한병원협회에 따르면 비상벨은 설치 비용 30만원, 연간 유지비용 300만원, 보안인력 연간 배치 비용은 2000~3300만원으로 추산된다. 결국 소규모 병·의원이 진료현장 안전을 강화하려면 매달 300만원 이상의 비용을 사비로 부담해야 하는 것이다.

전날 사건이 발생한 부산의 정신과 전문병원도 병상이 49개였고 전문의도 피해 의사 1명뿐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현장에서는 사각지대 해소를 위해 세부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말한다. 대한신경정신의학회 관계자는 "현재 100병상 미만의 병·의원들은 보안 설비·인력 관련 지원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소규모 의료시설에 대한 지원이 반드시 필요하다"며 "좀더 구체적인 지원책이 나오도록 정부, 의료당국 등과 면밀히 상의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