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기업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당국이 밝혀야"
中, 감사기록 보고하라는 美에 "국가기밀" 수년간 거부
백악관, 의회 일제히 "법 안지키면 미국 내 거래권 박탈"

루이싱 커피 중국 매장.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뉴욕증시에 상장된 중국 기업들의 투명성에 문제가 있다며 중국 당국의 조사를 촉구하기로 했다고 CNBC가 9일(현지 시각) 보도했다. 이로써 갈수록 치열해지는 양국의 무역전쟁에 이어 미중 간 '금융전쟁'에도 속도가 붙을 거란 전망이 나온다.

SEC는 전날 원탁회의를 열고 신흥시장과 관련한 내용을 논의했다. 특히 이 자리에서는 미국 증권거래소에 상장된 중국 기업의 사기 행각과 허위 대차대조표 문제 등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중국 규제 당국이 투명하게 밝혀야 한다며 조사를 압박하기 위한 구체적 방안들이 거론된 것으로 알려졌다.

SEC 관계자는 CNBC에 "규제 당국은 중국 기업들 내부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내는 데 정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아달라"며 "위원회는 중국 기업들이 무슨 일을 만들고 있는지 중국 당국이 자세히 알려주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中 당국 "감사기록은 국가기밀" 수년간 美 접근 거부

2002년 사반스-옥슬리(Sarbanes-Oxley) 법에 따라 설립된 미 공기업 회계감독위원회( PCAOB)는 국내외 모든 국유 법인의 감사보고서에 대해 주기적으로 감사를 실시하고, 이를 SEC에 알려야 할 의무가 있다. 외국 기업도 예외가 없다. 위원회는 외국 기업에 대한 투명성 제고를 위해 감사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각국과 수년 간 협상을 거쳐왔다.

그런데 중국 정부는 감사기록이 '국가기밀'에 해당한다며 위원회와 SEC의 검토 요청을 여전히 거부하고 있는 상태다. CNBC는 중국 기업에 대한 조사에 어려움을 겪는 것은 당국의 조직적인 방해 때문이라고 전했다. 아울러 중국과의 무역전쟁에 이은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책임론으로, 미국 내 중국에 대한 불신과 투자자들의 좌절감도 커졌다고 진단했다.

중국 기업 관련 외환거래 자금 운용사인 크레인쉐어즈의 최고투자책임자 브랜던 아헌은 "중국 정부가 많은 기업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문제"라며 "200여개 중국 상장기업 가운데 몇몇 국유기업들에 대한 재무 정보를 공개하는 것은 중국인에게 매우 민감한 사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 증시에 상장된 기업이라면 당연히 미국의 규정을 따라야한다"고 했다 .

전직 SEC 위원인 로저 실버스 유타대 회계학 교수는 CNBC와 인터뷰에서 "중국이 감사기록에 대한 접근을 워낙 강하게 차단해왔다"며 "중국에 대한 신뢰가 떨어진 반면 좌절감이 커졌고, 미국에서는 이제 무역전쟁과 별개로 중국과의 금융 부문 싸움을 택하려는 욕구가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실버스에 따르면, SEC는 이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증인 그룹'을 준비하고 있다. 여기에는 머디 워터스 캐피탈(Muddy Waters Capital) 창업자 겸 최고투자책임자이자 최근 중국 루이싱커피 분식회계 적발에 동참한 카슨 블록도 참가할 예정이다. 그는 "루이싱커피의 파산과 분식회계는 중국계 기업들의 극단적 사기 위험에 대해 미국 정책입안자, 규제당국, 투자자들을 일깨워준 사건"이라고 했다.

◇"우리 자본시장 법 거스르면 상장폐지" 정치권도 나서

정치권도 이 문제를 주목하고 있다. 지난 5월말 미 상원은 외국 기업이 공기업 회계감독위원회의 기준을 의무적으로 준수하도록 하는 '외국 지주회사 책임법(Holding Foreign Companies Accountable Act)'을 통과시켰다.

이 법에 따르면, 위원회가 3년 연속 특정 발행인의 공공회계법인을 검사할 수 없는 발행인의 유가증권은 미국 내 증권거래소에서 거래자격을 상실한다. 의회는 현재 해당 법안을 심의 중이다.

마르코 루비오 상원의원도 미국의 회계 및 감독규정을 준수하지 않는 외국 기업을 상장폐지하는 내용의 초당적 법안을 발의했다.

백악관은 지난달초 이미 제재 조치를 예고했다. 백악관은 "중국 기업에 의한 중대한 위험으로부터 미국 투자자들을 보호하겠다"며 "중국이 우리 투자자들의 당연한 권리를 보호하지도 않으면서 우리 자본시장의 이익을 얻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시장 투명성을 위한 법을 무산시키려는 중국의 행동은 투자자들에게 상당한 위험을 야기한다"고 발표했었다.

◇中 기업 사기극 폭로한 '차이나 허슬' 재조명

이번 일을 계기로 과거 중국 기업의 사기극을 폭로한 영화 '차이나 허슬(China Hustle)'도 재조명을 받는다.

2018년 3월 미국에서 개봉한 이 다큐멘터리 영화는 미국에 상장된 중국 기업들의 사기 행각을 다뤘다. 이른바 '중국 주식 예찬론자'이자 GEO 인베스팅의 설립자인 댄 데이비드(Dan David)는 주식중개인 카슨 블록이 중국계 제지회사 '오리엔트 페이퍼'의 실상을 목격하고 결국 사기 행각을 밝혀낸 것을 계기로 중국 주식에 등을 돌리게 된다.

실제 2010년 6월 카슨 블록이 설립한 머디 워터스 캐피은 오리엔트 페이퍼에 대한 30페이지 분량의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강력 매도’ 의견을 냈다. 다음날 오리엔트 페이퍼 주가는 개장부터 하락해 25% 하락한 채로 장을 마감했고, 단기간에 50% 넘게 폭락했다.

회사명인 '머디 워터스(muddy waters)'는 '혼탁한 물'을 뜻한다. 중국 사자성어 혼수모어(混水摸魚)에서 따온 표현으로, 카슨 블록이 이러한 방법으로 중국 기업의 비리와 부정을 밝혀냈다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