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땐 틀리고 지금은 맞다’라는 말처럼 아전인수나 임기응변, ‘내로남불’의 상황을 잘 드러내는 표현도 없다. 사실이든 의도한 변명이든, 화자(話者)의 입장을 떠나 저런 말을 듣고 속 시원히 털어 넘길 이가 얼마나 될까 싶다.

개인사도 그럴진대, 국가 정책이 그런 모습이라면? 그것도 대한민국 국민이 가장 민감하게 여기는 부동산·집값 문제를 두고서라면 어땠을까.

처음엔 그랬다. 새로 대권을 잡은 대통령도 갓 취임한 장관도 (부동산) 투기수요는 억제하고 (주택) 실수요자는 보호하겠다고.

그리고 판단했다. 집값 급등의 원인이 다주택 보유자에게 있다고. 집 한 채 없이 이집 저집 세살이를 떠돌아야 하는 무주택 서민의 주거복지를 이야기하려 했던 새 정부의 시선에선, 살지도 않는 집을 여러 채 가진 이들은 집값 교란의 주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지금은 이렇다. 취임 3년이 넘은 그때의 대통령도 장관도 여전히 투기수요는 차단하고 실수요자는 보호해야 한다고.

그리고 이렇게 생각한다. 스무 차례가 넘는 부동산 대책에도 여태 집값이 잡히지 않은 이유는 여전히 다주택자 때문이라고. "사는 집이 아니면 파시라. 집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불편하게 된다"는 경고에도 집값이 천정부지인 것은 그들이 ‘잉여’의 집을 내놓지 않아서라고. 집이 여러 채면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투기꾼이라고.

김현미(왼쪽) 국토교통부 장관과 최근 다주택 처분 논란을 일으킨 노영민(가운데) 대통령 비서실장, 김상조 정책실장이 7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을 듣고 있다.

3년 전엔 그랬다. 다주택자라면 임대사업자로 등록하면 좋겠다고.

그래서 나섰다. 보유세 감면 등의 세제 혜택을 주고 ‘음지’에 있던 임대사업자들을 제도권 아래로 불러모으기로. 그동안 숨어 있던 임대사업자들은 정부가 주는 ‘당근’을 받고 그렇게 세상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한다. 그동안 임대사업자 규모와 세원 파악이 얼추 끝났으니, 그동안의 시혜는 끊는 것이 어떻겠냐고. 다주택자라는 점에서도 그렇고, 조세정의 실현 차원에서도 그렇고.

판을 틀기로 했다. 그동안 등록 임대사업자에게 줬던 소득세와 법인세와 양도소득세, 지방세, 종합부동산세 감면 같은 세제 혜택을 없앨 거라고. 그동안 임대사업자 등록 의무화를 통해 공급되는 주택수와 세원이 파악됐으니 그들에게 줄 당근이 더는 필요 없다고. 임대사업자들은 이제 ‘다 잡은 물고기에 먹이 안 준다’는 말을 실감하게 됐다.

문재인 정부 출범 초기엔 그랬다. 투기수요는 잡되, 서민·무주택자의 주거복지를 지향하고 1주택자와 실수요자는 보호해야 한다고. 그래서 투기 우려가 있는 곳과 투기 세력만 잡을 수 있는 ‘핀셋’ 규제가 필요하다고. 그러기 위해선 부동산 조세정의도 실현돼야 한다고.

그래서 ‘칼’을 빼 들었다. 부동산 값이 부쩍 오른 곳을 골라 투기지역과 투기과열지구로 지정했다. 총부채상환비율(DTI)과 담보대출인정비율(LTV)을 강화하며 부동산 시장으로 흘러 들어가는 돈줄을 조였다. 대출 규제는 까다로워졌지만 그래도 그땐 9억원 이하 주택을 가진 1주택자까지는 ‘실수요자'란 테두리 안에 있었다.

3년이 지난 지금 시장은 이렇게 묻고 또 말한다. 서민과 무주택자, 실수요자 이야기는 이 순간에도 빼놓지 않고 반복되지만 나아진게 뭐냐고. 1주택자도 다 같은 1주택자가 아니라고. 집이 한 채뿐이어도 전세를 끼고 사면 투기꾼이란 손가락질을 받게 됐다고. 비싼 집은 차치하고, 이젠 정말 목돈 없이는 집을 살 수 없게 됐다고. 전세 대출조차 받기 더 힘겨워지게 됐다고.

빼든 칼이지만 그땐 그래도 희망은 있었다. 집 걱정, 전·월세 걱정, 이사 걱정 없는 주거 사다리를 만들겠다고 했으니까. 집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란 작은 희망의 불씨라도 가슴 한편에서 키울 수 있었으니까.

그들은 이제 어떤 칼도 믿지 않는다. 높아진 대출 문턱과 사라져버린 주거 사다리에 내 집 마련의 꿈은 더 멀어졌으니까. 누르면 그 옆이 부풀어 오르는 풍선효과를 보는 것도 지쳤으니까. 조세 정의는 집값 잡기라는 명분 앞에서 징벌적 과세로 모습을 바꿔가고 있으니까.

그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칼은 그저 칼일 뿐이라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고, 과정은 인내의 연속이었고, 결과는 상처뿐이었다고. 희망의 불씨는 ‘희망 고문’이란 이름으로 타 재만 남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