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무역 전쟁의 설계자인 피터 나바로 백악관 무역·제조업 정책국장이 중국과의 1단계 무역 합의가 끝장났다고 말했다가 번복했다. 나바로 국장은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핵심 참모 중 중국에 가장 적대적 성향을 보이는 인물이다.

그런 그가 22일(미국 시각) 중국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를 미국에 퍼뜨렸다고 비난하며 올해 1월 타결된 미·중 1단계 무역 합의도 끝났다고 말한 것이다. 논란이 일자 나바로 국장뿐 아니라 트럼프 대통령도 미·중 1단계 무역 합의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진화에 나섰다.

이날 미 국무부까지 중국 4개 관영 언론 매체를 외국 사절단(foreign mission)으로 추가 지정하며 대중(對中) 압박 수위를 높였다. 중국 측은 "즉시 잘못을 중지하지 않으면 정당한 반격에 나서겠다"고 경고했다.

대중 강경론자 나바로 "미·중 1단계 무역 합의 끝장났다"

나바로 국장은 이날 저녁 폭스뉴스 방송 프로그램 ‘더 스토리’와의 인터뷰에서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로 볼 때, 1단계 무역 합의는 끝장난 건가’라는 앵커의 질문에 "끝났다"고 답했다. 그는 미·중 1단계 무역 합의가 끝나버린 터닝 포인트(전환점)로 중국에서 시작된 코로나바이러스 확산을 꼽았다.

피터 나바로(왼쪽 두 번째) 미국 백악관 무역·제조업 정책국장이 22일 폭스뉴스 방송 프로그램 ‘더 스토리’와의 인터뷰에서 “미·중 1단계 무역 합의는 끝장났다”고 말했다가, 이후 논란이 일자 번복했다.

그는 "중국은 1월 15일 워싱턴에 와서 무역 합의에 서명했는데, 그때는 중국이 바이러스가 출현한 것을 안 지 두 달이나 된 시점"이라며 "그때 이미 중국은 바이러스를 퍼뜨리기 위해 수십만 명을 미국에 보냈고 (중국 대표단이 탄) 비행기가 이륙한 지 몇 분 후 우리는 이 전염병 대유행에 관해 듣기 시작했다"고 했다. 나바로 국장은 중국의 이런 행동을 1941년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기 몇 주전 프랭클린 D. 루스벨트 행정부와 거짓 평화 협상을 한 것에 비유하기도 했다.

미·중이 코로나바이러스 책임론을 놓고 치고받는 가운데 무역 합의가 깨졌다는 미국 측 고위 인사의 발언까지 나오면서 금융시장은 요동쳤다. 미 증시 선물과 원유 가격이 급락했고 호주 달러화 등의 가치가 하락했다.

트럼프 "중국 무역 합의 온전" 즉각 진화

나바로 국장은 논란이 커지자 즉시 "중국과의 무역 합의는 여전히 유효하다"는 내용의 입장문을 냈다. 자신의 발언이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멋대로 인용됐다고도 했다. 그는 "내 발언은 1단계 무역 합의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며 "단지 중국이 바이러스의 기원에 대해 거짓말을 하고 전 세계에 전염병 대유행을 일으켜 우리가 중국공산당을 향해 갖게 된 신뢰 부족에 대해 말한 것"이라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도 즉각 나바로 국장의 발언을 진화했다. 그는 밤 10시 22분(미 동부 시각) 트위터에 "중국 무역 합의는 온전하다. 중국이 (1단계) 합의 조건을 계속 이행하길 바란다"고 썼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019년 6월 29일 G20(주요 20국) 정상회의가 열린 일본 오사카에서 별도 정상회담을 하기 위해 만나 악수를 하고 있다.

미·중은 올해 1월 22개월간 이어진 무역 분쟁에 쉼표를 찍었다. 중국은 1단계 무역 합의로 올해와 내년 2년간 미국산 상품과 서비스를 2017년 수준 대비 2000억 달러어치 더 구매하기로 했고 미국은 중국산 제품에 부과한 관세 중 일부를 낮추기로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을 향해 수시로 1단계 무역 합의 약속을 지킬 것을 압박했으나, 1분기 중국의 미국산 제품 수입은 코로나바이러스 사태 여파로 오히려 감소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5개월도 안 남은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하려면 미 중서부 농업지대 팜 벨트의 표가 필수적이다. 그가 중국에 콩, 면화, 옥수수 등 미국산 농산물 수입을 약속대로 서둘러 늘리라고 종용하는 이유다.

양국이 사사건건 대립하며 관계가 추락하는 중에도 트럼프 행정부는 재선을 의식해 무역 합의만큼은 중국의 약속대로 얻어내겠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미 무역대표부 대표는 지난주 미 하원 세입세출위원회에 출석해 "코로나바이러스 대유행과 중국의 홍콩 자치 탄압, 중국의 무역 합의 이행 부족으로 양국 사이에 큰 이견이 있지만, 그럼에도 무역 합의는 변함 없다"고 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도 18일 중국이 1단계 무역 합의 약속을 지키겠다고 다짐했다고 밝혔다. 그는 앞서 16~17일 하와이에서 중국 외교 사령탑인 양제츠 중국공산당 외교 담당 정치국위원과 비공개 회담을 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 오갔는지는 공개되지 않았으나, 중국이 합의 이행 차원에서 미국산 농산물 구매를 늘릴 것이란 관측이 나왔다.

미 국무부, 中 4개 관영 매체 추가 규제

폼페이오 장관이 이끄는 미 국무부는 이날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 중국중앙방송(CCTV), 중국신문사(CNS), 환구시보를 외국 사절단으로 추가 지정했다. 앞서 2월 신화사와 CGTN 등 중국 5개 관영 매체를 외국 사절단으로 지정한 데 이어, 추가 언론 규제에 나선 것이다. 이들 관영 매체들은 모두 중국공산당의 선전선동 조직이라는 게 미 국무부의 설명이다. 외국 사절단으로 지정되면 각 매체는 미 국무부에 인력 운영, 부동산 소유 현황 등을 보고해야 한다.

중국 외교부는 미 국무부의 중국 언론 규제 조치에 반발했다. 자오리젠 중 외교부 대변인은 23일(중국 시각) 정례 브리핑에서 "미국이 잘못을 즉시 중지하지 않으면 중국은 필요한 정당 반격을 할 것"이라고 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조치를 할 것인지는 언급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