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 배터리에서 전력을 빼내 전기 기기를 구동하는 기술이 현실화되고 있다. 자동차를 대용량 에너지 저장장치(ESS)로 사용하는 것이다. 낮에는 태양광 발전소에서 생산된 전력을 전기차에 저장하고, 밤에는 이 전기로 가정의 TV, 에어컨을 가동하는 식이다.

FCA의 V2G 서비스 개념도.

V2G(Vehicle to Grid)라 불리는데, 전기차 보급이 늘어나고, 배터리 용량이 커지면서 글로벌 자동차 업체들이 속속 관련 기술 개발에 뛰어들었다.

FCA(피아트크라이슬러)는 지난달 말 피아트 본사가 있는 이탈리아 미라피오리에서 V2G 설비 가동에 들어갔다. 프랑스 에너지 회사 엔지(ENGIE)와 손잡고 전기차에서 전기를 빼내어 전력망에 공급할 수 있는 설비를 갖춘 것이다.

현재는 전기차 64대를 연결해 ESS 처럼 쓰는 정도인데, 2021년에는 한 번에 전기차 700대를 연결해 전기를 도시에 공급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이 경우 전기차 ‘발전소’의 최대 전력 공급 용량은 25MW로, 1만1500가구에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규모다. 태양광발전소로 이 정도 발전량을 내려면 축구장 38개 정도 넓이의 땅에 태양광 패널을 설치해야 한다.

일본 닛산이 최근 발표한 '차량에서 집으로(Vehicle to Home)' 전력을 공급하는 솔루션 개념도. 전기차의 대용량 배터리를 전력 공급 장치로 활용하는 것이다.

로페르토 디 스테파노 FCA e모빌리티 사업부장은 "일반적으로 전기차 배터리에 저장된 전력의 80~90% 정도는 고스란히 차 안에서 쌓여있고 쓰이지 않는다"며 "V2G 기술은 전기차 사용자가 전기차에서 놀고 있는 전력을 판매하고 수익을 거둘 수 있게 하면서 동시에 안정적인 전력망 관리를 가능하게 한다"고 말했다.

V2G 기술은 처음 일본 닛산 등 차데모(CHAdeMO·일본식 급속충전시스템) 충전 기술을 채택한 회사들이 개발했다. 최근 유럽 자동차 회사들도 적극적으로 V2G 기술 및 서비스 개발에 나섰다.

독일 폴크스바겐은 전기차 전용 플랫폼을 기반으로 한 전기차 ID.3를 내놓으면서 전기차에 저장된 전력을 판매하는 서비스도 개발할 것이라고 밝혔다. 미하엘 요스트 고객담당 최고전략책임자(CSO)는 "2025년이 되면 폴크스바겐 전기차의 전력 저장량이 350GW 정도에 달하고, 2025~2030년이되면 1TW까지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요스트 CSO는 "전세계 수력 발전소의 발전량을 넘어서는 상황인데, 여기서 새로운 사업 영역이 생겨날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 전기차 코나의 배터리로 캠핑 트레일러에 전력을 공급하는 모습.

국내에서는 현대차그룹이 V2G 기술 개발에 적극적이다.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는 먼저 자동차 전원으로 전기 기기 1~2개를 구동하는 V2L(Vehicle to Load) 기술 적용에 나서고 있다. 코나와 니로의 경우 차량 밖에 220V(볼트) 콘센트가 달려있는 데, ‘유틸리티 모드’를 설정하면 차량 내 배터리에서 전력을 빼낼 수 있다. 야외에서 차량에 저장된 전기를 이용해 전열기구, 조명기구 등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지난달 말 발표된 현대차와 한화의 전기차 사업 협력도 V2G 서비스와 연관된다. 현대차그룹은 2021년에 전동화차량(전기차와 수소차를 포괄하는 개념) 전용 플랫폼을 기반으로 한 전기차 4~5종을 내놓을 계획이다. 전기차를 가정용 ESS로 활용하면 다양한 사업 모델 개발이 가능하다. 두 회사는 현대차, 기아차 등 자동차 보유 고객과 한화큐셀을 비롯한 한화(000880)의 신재생에너지 관련 고객 및 인프라를 활용해 대규모 ESS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