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비즈 창간 10주년 기획]

2020년은 21세기의 원년인 2001년 출생한 사람이 성년이 되는 해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전 세계를 휩쓸면서 경제와 사회에 새로운 화두를 던진 해이기도 하다. 국내에서는 21대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이 치러졌다. 혼란과 불안의 정서가 어느 때보다 고조돼 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나라 곳곳에서는 옛 건물이 허물어지는 동시에 새로운 도시가 계획되고, 새 철길과 도로가 만들어지고 있다. 오늘 우리가 사는 모습은 미래에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까. 창간 10주년을 맞은 조선비즈가 2020년의 대한민국 모습을 기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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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월 23일 오후 경찰청 헬기에서 내려다 본 서울 용산구 주한미군기지의 모습.

2020년 5월 서울 용산구 미군기지 메인포스트 남동쪽. 인부들이 철조망을 뜯어내며 담벼락이 드러나자 포크레인이 뒤를 이어 담을 무너뜨렸다. 미군 장교 숙소로 사용되던 외인임대아파트 5단지로 통하는 길을 만드는 작업이다. 한미 정부가 기지 이전에 대한 기본합의를 이룬지 30년 만에 용산 기지의 공식 반환을 알리는 서곡이 울렸다.

한국인에게는 100년 넘게 금단의 땅이던 이곳은 축구장 340개 규모이자, 여의도 면적(290만㎡)과 맞먹는 크기의 생태·문화공원으로 다시 태어날 예정이다.

미군장교 숙소로 사용된 용산미군기지 외인임대아파트 5단지는 2019년 말 임대계약이 종료됐다. 정부는 2020년 5월 이곳의 담장을 허물어 임시개방용 출입구를 설치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서울 용산구 용산1가~용산3가동에 걸친 용산 미군기지는 이태원로를 기준으로 북쪽의 메인포스트(Main Post)와 남쪽의 사우스포스트(South Post)로 나뉜다.

메인포스트에는 주한미군사령부와 한미연합사령부(한미연합사) 등 지휘부와 주한미군의 핵심전력인 미 8군사령부 등이 있었다. 사령부 건물과 군사고문단, 참모부 건물이 나이트필드 연병장을 가운데 두고 마주보는 형태로 배치돼 있다. 연병장 서쪽에는 유사시에 지휘부가 전쟁을 통솔하기 위한 첨단시설이 마련된 지하벙커인 ‘CC서울’이 지어졌다.

용산기지의 옛 일본군장교숙소 건물은 주한미합동군사업무관으로 사용됐다.
용산기지 안에 남아 있는 일본군 위수감옥

주거·지원시설이 배치된 사우스포스트는 국립중앙박물관, 용산가족공원과 맞닿아 있다. 주한미군의 골프장으로 사용된 부지가 반환되면서 그 자리에 국립중앙박물관이 지어졌고, 또다른 반환 부지에 공원이 조성된 결과다.

그래픽=박길우

2020년, 용산 미군기지는 무대의 커튼이 완전히 내려지기만 기다리는 상태다. 부지 반환 절차가 공식적으로 시작된 2019년 12월 기준으로 용산기지의 90%가 평택기지로 이전했다. 2020년 6월 현재는 메인포스트의 한미연합사령부와 연합사 지원시설, 기지 운영시설만 남아 있다.

2020년 6월 촬영한 용산미군기지 서쪽 캠프킴 입구 전경. 용산구 한강로1가 1-1번지 일대에 걸친 캠프킴에는 미국위문협회(USO) 관련 시설 등이 있었다. 캠프킴 부지는 용산공원 사업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 청일전쟁·일제강점기·한국전쟁 거친 용산 금싸라기 땅

교통의 요지인 용산 일대가 외세의 손에 떨어진 역사는 1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 말기에 한반도를 침략한 몽고군이 당시 용산지역을 병참기지로 활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임진왜란 때는 왜군 병력이 주둔했고, 임오군란(1882년) 때는 청나라 병력이 용산에 진주했다.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청나라군과 일본군이 각각 주둔하기에 이르렀다.

외국군이 용산 일대에서 본격적으로 지배력을 휘두른 시기는 1904년 이후다. 러일전쟁이 벌어지자 일본군이 용산 일대를 본격적으로 점령하고 나섰다. 약 115만㎡ 땅을 강제로 수용해 위수(衛戍)지역으로 선포하고, 조선군사령부를 포함한 일본군 시설을 세워 병참기지로 만들었다.

한반도로 진주한 미군이 일제강점기 조선총독관저로 사용된 건물 앞에서 1945년 촬영한 사진

이 곳에 미군이 처음 발을 들인 때는 1945년이다. 태평양전쟁에서 승리한 미군이 일본군 병영을 접수했다. 미군은 이후 유엔군의 일원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하면서 다시 용산으로 입성했고, 휴전 이후인 1957년 주한미군사령부를 창설했다.

한 세기 넘게 한국령이 아니던 용산 일대가 다시 주목을 받은 계기는 1990년 한·미 정부의 용산기지 이전 협상 타결이었다. 당시만 해도 양국 정부는 1996년 말까지 용산기지를 이전한다는 구상을 내놨다.

1990년 6월 26일자 조선일보 1면에 실린 용산기지 반환 합의 소식

그러나 이전 협상은 기본합의서를 체결한지 14년 만인 2004년에야 타결됐다. 이듬해 한국 정부는 용산기지 부지를 국가 주도로 공원으로 만들겠다는 방침을 발표하고, ‘용산공원 특별법’을 제정하며 발빠르게 움직였다. ‘용산공원 조성 특별법’이 2007년 국회를 통과했을 때만 해도 전망은 장밋빛이었다.

정부는 △2011년까지 용산공원 조성계획 등 각종 세부 계획 수립 △미군기지 이전 완료 예상시기인 2012년 용산공원 착공 △2015년 공원 일부 개방 등 목표를 세웠다. 국토해양부(현 국토교통부) 산하에 전담부서인 ‘용산공원조성추진기획단’도 설치했다.

그럼에도 공원화 사업은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했다. 주한미군 이전 문제가 얽혀 수년 동안 답보한 탓이다. 주한미군 1만여명이 생활하는데 필요한 지원시설과 업무시설이 밀집된 용산기지를 이전하는 작업도 간단치 않았지만, 이전 비용 문제가 컸다. 1990년 이전 합의각서를 체결하면서 한국 정부가 이전 비용을 부담하기로 한 점 때문에 새로운 후보지를 선정하고 협상을 마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래픽=김란희

정부는 2011년 용산공원을 생태공원으로 조성하겠다는 기본 구상과 종합기본계획(마스터플랜)을 발표했다. 이후 국제공모를 진행하고 기본설계 용역에 착수했다. 이 과정에서 공원조성계획을 두고도 잡음이 일었다. 당초 6개 구역으로 나눠 조성하려던 구상을 전면 폐기하고, 2014년 단일공원으로 통일감 있게 조성하는 방향으로 기본설계 내용을 변경했다. 정부 부처별로 용산 부지에 기념시설 등을 지으려던 계획도 전면 철회했다. 이 가운데 용산기지에 주둔하던 미군 부대들도 속속 평택기지로 이전했다.

2020년 6월 현재, 정부는 기본설계용역 결과를 바탕으로 전문가 의견을 수렴하는 단계에 도달했다. 공원부지로 확정된 약 243만㎡ 경계 밖에 있는 캠프킴과 유엔사, 수송부 부지는 별도로 매각해 개발할 예정이다. 용산기지 한 가운데에 자리한 미군 전용 숙박시설인 드래곤힐호텔은 평택 이전이 불발됐다. 당초 한·미 정부가 미군기지 이전을 협의하면서 호텔은 현재 위치에 두기로 협의했던 탓이다.

어떤 형태로 공원을 만들고 어떤 시설을 배치할지 등 구체적인 밑그림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정부는 현재 준비 중인 세부설계안을 2020년 하반기에 공개하고, 공론화 과정을 거쳐 이를 확정할 예정이다. 오는 2021년까지 반환된 부지 일부를 공원으로 조성하고 임시개방하고, 2022년부터 본격적으로 공원으로 조성하는 방안을 구상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조선육군창고로 사용된 건물을 미군이 재건하는 모습을 1950년대 촬영한 사진(위). 용산공원갤러리로 변신한 이 건물은 2020년 6월 현재 코로나19 사태로 휴관 중이다.

정부의 용산공원 사업에 맞춰 서울시는 용산기지 캠프킴 부지의 옛 주한미군 미국위문협회(USO·United Service Organization) 건물에 ‘용산공원갤러리’를 2018년 개관했다. 용산 기지의 역사를 보여주는 자료들을 전시하고, 앞으로 반환되는 부지를 어떻게 활용할지 시민들과 고민하기 위한 공간이다.

일제 강점기 조선육군 창고였던 이 건물은 한국전쟁 이후 한반도에 주둔한 미군이 재건해 사용했던 건물이다. 다만 2020년 6월 찾은 용산공원갤러리의 문은 닫힌 상태였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다시 임시 휴관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