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V 투싼 미국 생산·광주형 일자리 반대 강경론
임금 인상 요구는 쑥 들어가…대신 시니어 촉탁직 요구
2025년까지 연 평균 2400명 정년 퇴직…노조 유지 갈림길

한국 노동운동의 상징적인 존재인 현대자동차노동조합이 이전과 달라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 임금 인상 요구는 거의 하지 않지만 공장 일감 확보에 관한 사안에 대해서는 강경론을 내놓고 있는 것이다.

'전투적 경제주의'의 대명사인 현대차 노조의 노선 변경은 복합적인 이유가 있다. 먼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임금 인상을 주장하기 어려워 졌다. 또 글로벌 자동차 업체들이 감산(減産)에 들어가는 상황에서 위기감을 느낀 데다, 내년부터 현대차 노조원의 대규모 정년퇴직이 예정되어 있다는 게 배경으로 거론된다. 사측이 자연스럽게 국내 생산을 줄이면서 노조 힘을 빼는 데 대항해 일감을 확보하고 노조 규모를 유지하자는 포석 아니냐는 것이다.

지난 21일 서울 정동 민주노총에서 열린 '광주형 일자리 강행 규탄 및 전면 재검토 촉구' 기자회견에서 금속노조 김성갑 한국GM지부장, 최종태 기아자동차지부장, 이상수 현대자동차지부장(오른쪽부터)이 손피켓을 들고 있다.

통상 ‘현대차 노조’로 불리는 전국금속노동조합 현대차 지부는 지난 26일 발행한 노조 기관지 ‘현차 지부 소식’을 모두 일감 문제로 채웠다. 노조 기관지는 통상 2쪽 분량으로 1주일에 2차례 발행된다. 앞 면에는 지난 21일 서울 정동 민주노총에서 현대차, 기아차, 한국GM 노조가 함께 연 ‘광주형 일자리 강행 규탄 및 전면 재검토 촉구’ 기자회견이, 뒷면에는 오는 8월 중형 SUV(스포츠유틸리티차) 투싼 풀체인지(완전변경) 모델을 앞두고 미국 앨라배마 공장 생산을 막겠다는 노조의 입장이 실렸다.

두 어젠더 모두 울산 공장의 일감과 연결된 사안이다. 투싼의 경우 2004년 첫 모델이 나온 이후 울산 제5공장이 대부분을 생산하고 있다. 중국이나 체코슬로바키아 공장에서도 생산을 하고 있긴 하지만, SUV 수요가 큰 미국 수출용 모델의 경우 울산 공장이 맡는다. 그런데 미국 시장에서 세단 수요가 급격히 줄고, 그 자리를 SUV가 채우면서 앨라배마주 현지 공장에서 투싼을 생산하는 것 아니냐는 설이 나오고 있다.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근로자들이 퇴근하고 있다.

4세대 투싼의 경우 올해 하반기 현대차가 미국 전략 차종으로 새로 출시하는 픽업 트럭 산타크루즈와 플랫폼을 공유한다. 투싼도 산타크루즈와 함께 앨라배마주에서 생산하토록 하는 게 사측 입장에서 합리적인 선택지인 셈이다. 지난해 미국 내 투싼 판매량은 13만7400대로 미국 현지 공장에서 생산하는 싼타페(12만7400대)보다 1만대 더 많다. 현대차가 국내 공장 생산 차종을 다른 국내·해외 공장으로 이관해야 하는 경우 노조에 사전 통보 후 합의를 구해야한다.

현대차 노조는 광주형 일자리에도 계속해서 반대 의견을 내놓고 있다. 광주광역시, 광주은행, 현대자동차 등이 합작해 세운 외주 생산 회사 광주글로벌모터스가 공장 착공까지 착수한 시점에서도 강경 일변도다. 광주글로벌모터스는 현대차로부터 2021년 경차 크기의 소형 SUV를 수주받아 생산할 계획이다. 현대차 노조는 "한국GM의 경차 스파크를 생산하는 창원 지역, 쌍용차 티볼리를 생산하는 평택지역, 현대차의 소형 SUV 코나를 생산하는 울산지역, 기아차의 경자 모닝을 위탁생산하는 동희오토 서산지역에서 1만2000개의 일자리가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현대차 코나 등 소형 SUV 생산이 줄 것이라는 게 현대차 노조에게 핵심 문제인 것이다.

현대차는 올해 들어서 임금 등 처우 개선 문제는 거의 거론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현대차 노조는 임금 동결과 고용 안정을 맞바꾸는 방안까지 고려하고 있다. 지난 4월 기관지에서 "코로나19로 세계 노동시장은 큰 충격을 받았고, 현대차도 수출시장 붕괴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임금을 동결하는 대신 고용을 보장하는 독일 노사의 위기협약을 주목해야 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현대차 노조는 지난 19일 열린 고용안정위원회에서 중장기 인력운영 대책과 물량 불균형 문제를 주로 거론했다. 물량 불균형은 코로나19로 수출이 막히면서 그랜저, 팰리세이드 등 국내에서 큰 인기를 끄는 공장과 수출 비중이 높은 공장의 가동 상황이 차이가 나자 이를 시정하기 위해 차종 확대 등을 노조가 꺼내든 이슈다. 중장기 인력운영 대책은 내년에 본격적인 가동에 들어가는 전기차 전용 생산 시설과 생산직 근로자의 대규모 정년 퇴직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현대차 노사는 2020년 임금단체협상(임단협)은 아직 시작조차 못했다. 현대차 노조도 올해 임단협에서 임금 인상 등을 강하게 내세우지 않겠다는 기류다. 올해 39차례 발행된 노조 기관지에서 임금 인상이나 처우 개선 문제는 단 한번도 크게 다뤄지지 않았다. 오히려 정년 퇴직 후 계속 공장에서 일하는 시니어 촉탁직 처우 문제가 두 차례 거론됐다.

이 같은 현대차 노조의 변화는 미국 디트로이트처럼 울산 공장과 그 주변이 한 순간에 쇠락할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라는 게 자동차 업계의 설명이다. 가장 먼저 거론되는 건 현대차 노조의 노쇠화다. 현대차 노조는 올해부터 2025년까지 총 1만2500명이 정년 퇴직하게 된다. 지난해 1400명이었던 정년퇴직자는 올해 1900명, 내년 2300명으로 늘어난다. 이후 해마다 2400~2700명이 만 60세 정년을 꼬박 채우게 된다.

현대차 노조는 지난해 말 현재 총 5만600명이 가입되어 있다. 노조원의 24.7%가 정년퇴직을 하게 되는 셈이다. 정년퇴직 조합원 가운데 다수는 울산·전주·아산 소재 지부 소속(총 인원 3만4100명)이다. 강성 노조를 이끌었던 1960년대생 근로자들이 정년 퇴직하고 나면 현대차 노조의 힘이 줄 것이라는 게 자동차 업계 일각의 관측이다.

여기에 내년에 현대차가 전동화차량(전기차와 수소차) 전용 플랫폼을 사용하는 본격 전기차 생산에 나서면 지금보다 훨씬 적은 수의 근로자만 있어도 된다. 또 조립 공정에서 근로자의 숙련성에 의존할 필요성도 줄어든다. 자동차 노조의 힘은 2만개의 부품을 오차 없이 조립하는 숙련성에 있다. 전동화 차량이 공장의 탈(脫)숙련화를 야기하는 셈이다. 따라서 전기차 생산이 본격화되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노조의 교섭 능력은 지금보다 약화될 여지가 다분하다. 결국 지금 수준보다 더 고임금을 요구하기보다, 고용 안정과 일자리 확대를 명분삼아 노조의 세(勢)를 유지하는 게 현대차 노조 입장에서 합리적인 선택지가 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