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대기업 지배구조에 새 화두 던진 건 긍정적"

이재용 삼성전자(005930)부회장이 6일 경영권 승계 포기 선언을 한 데 대해 재계 일각에서는 삼성그룹의 규모나 현재의 법 제도 등을 감안하면 승계 포기는 사실상 예견돼 왔던 것과 다름없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총자산이 400조원이 넘는 삼성그룹은 지배구조 정점에 삼성물산(028260)이 있다. 삼성물산 또한 시가총액이 20조원에 달하고, 지분을 20%만 확보한다 해도 4조원이 필요하다. 더구나 삼성물산의 삼성전자 지분율은 5.01%에 그쳐 물산의 타 계열사 지배력도 부족한 상황이다. 이재용 부회장마저 불완전한 지배구조를 갖춘 마당에 편법 없이 자녀에게 승계하기는 쉽지 않다는 평가가 나오는 배경이다.

그동안 정부는 순환 출자 해소, 일감 몰아주기 규제 등 대기업 집단이 소수의 지분으로 그룹 전체를 지배하는 소유구조 행태를 바꾸기 위해 관련 규정을 강화해왔다. 신규 순환출자를 금지한 데 이어 기존 순환출자를 해소하도록 해 오너가 작은 지분으로 전 계열사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했다. 계열사 일감 몰아주기에 대한 규제도 강화해 총수 일가에 특혜가 가지 못하도록 했다. 게다가 상속세와 증여세는 세율 50~65%가 적용돼 승계 과정에서 막대한 현금을 확보해야 하는 부담이 크다.

이재용 부회장은 6일 그룹의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발생한 준법 위반 사항에 대해 사과하며 "제 아이들에게 회사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했다.

삼성그룹은 2년 전 공정위의 지시에 따라 삼성SDI와 삼성전기, 삼성화재 등이 보유한 삼성물산 지분을 매각해 기존 순환출자 고리를 완전히 해소했다. 그리고 일감 몰아주기 규제에 대한 정부 지침에 따라 내부거래 규모를 꾸준히 축소해 나가고 있다.

그러나 지배구조 개편은 아직 미완성이다. 대표적으로 △금융회사인 삼성생명의 삼성전자 지분 매각 이슈 △삼성물산의 삼성전자 지분 확대 등이 남아 있다. 또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지분을 상속할 경우 상속세 재원이 충분한지도 변수다. 이건희 회장은 삼성전자, 삼성물산, 삼성생명 등의 지분을 갖고 있으며 지분가치는 총 18조원에 이른다.

이런 상황을 고려하면 본인의 승계 작업도 아직 마무리하지 못한 이 부회장의 선택은 경영권 승계 포기로 수렴될 수밖에 없다는 게 재계의 평가다. 한 증권사 연구원은 "이 부회장 스스로도 아직 승계 작업이 마무리되지 않았고, 막대한 세금을 납부해야만 겨우 경영권을 행사할 수 있는 수준의 지분을 확보할 것"이라며 "세제 개편이 이뤄지거나 편법을 쓰지 않는 한 더 이상 승계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다만 이 부회장의 경영 승계 포기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는 하지만 한국 대기업집단의 지배구조에 선제적인 화두를 던진 것은 긍정적이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발표된 입장문에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이 부회장이 밝힌 삼성그룹의 미래는 소유와 경영이 분리된 구조다. 미국과 유럽 일부 기업이 도입한 것처럼 우리 기업들도 결국 가야 할 길이라는 것이다.

기업지배구조원장을 지낸 조명현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삼성을 포함해 국내 많은 기업은 아직 소유와 경영이 분리돼 있지 않지만, 앞으로는 경영은 전문 경영인에게 맡기고 오너는 공익재단을 통해 이사회에 참여해 경영을 감시하는 형태로 바뀔 것"이라며 "이 부회장의 발표는 한국적 기업지배구조, 이른바 K-거버넌스의 새로운 출발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가 있다"라고 평가했다.

이 부회장의 경영 승계 포기 선언으로 앞으로 재계에서는 새로운 지배구조 정립을 위한 제도 개선 논의가 활발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대표적인 것은 공익재단의 의결권을 5% 이내로 제한한 것이다. 조 교수는 "오너가 의사 결정 과정에서 완전히 배제되면 그 역시 문제가 있을 수 있다"며 "지배구조를 개선하는 과정에서 정책 당국과 재계, 시민단체가 중지를 모아 협의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