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복지부 2월 24일 원격의료 한시 허용 이후 10만건 넘어
의원급 57.6%, 종합병원 19.7%, 상급종합병원 2.7% 수준

#사례. 지난 8일 오후 5시 서울 서대문구의 한 내과의원. 전화를 걸어 콧물과 미열 등 감기 증세로 전화 처방이 가능하냐고 의뢰하자 "저희 병원에 과거에 내원하신 적 있느냐"는 물음이 먼저 돌아왔다. 내과의원측은 이어 "코로나 사태 전에 같은 증세로 약을 처방받은 기록이 있다면 가능하다"고 했다. 다만 "첫 내원이면 선생님께서 환자 상태를 아예 확인할 길이 없어서 (전화 처방은) 어렵다"고 했다.

7년째 의료계 반발로 시범사업에만 머물러온 원격 의료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을 계기로 한시적으로 전면 허용되면서 의료 현장에서 작은 변화가 생기고 있다. 앞서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는 2월 24일부터 한시적으로 환자가 의료기관을 직접 방문하지 않고도 전화 상담 및 처방을 받을 수 있도록 허용했다.

23일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전화 상담 처방이 이뤄진 이후 이달 12일까지 약 50여일간 전국 3072개 의료기관에서는 총 10만3998건의 전화 처방 및 처방이 이뤄졌다. 진료 금액으로 따지면 12억8812만원 수준이다. 하지만 전국에서 총 7만여개에 이르는 의원·병원·종합병원·상급병원 기관 수에 비해 전화 상담에 참여한 기관 수는 3072곳으로 약 4% 정도에 그쳤다.

전화상담 및 처방에 응한 병의원 10곳 중 약 6곳은 동네 의원급에서 이뤄졌다. 총 전화상담 횟수의 57.6%(5만9944건)가 의원급에서 이뤄졌으며 2차 병원 등 종합병원은 19.7%(2만522건), 3차 병원 등 상급종합병원은 2.7%(2858건)에 그쳤다.

전화상담 및 처방 진찰료 청구 현황.

2015년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사태때도 원격의료를 한시적으로 허용했지만 그때는 강북삼성병원 등 일부 병원에 국한했었고, 이번에는 모든 의료기관을 대상으로 했다. 의료법에는 병의원 간 원격의료가 허용돼 있으나 동네 의원 수준에서 그치는 것이다.

일부 코로나 경증·무증상환자를 치료하는 생활치료센터에서는 효과가 있었다. 병의원 간 화상 원격의료가 유용하게 쓰였다. 코로나19 확산세가 높았던 대구지역 경북대병원의 경우 하루 200건 가량의 전화상담·처방, 그리고 대리처방이 시행되고 있으며, 코로나19 전담 병원에서는 의료진 감염 최소화를 위해 대면 진료가 아닌 화상진료나 로봇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있다.

3월 초부터 경북 문경 소재 서울대병원 인재원에서 한달 이상 가동됐던 제3생활치료센터는 서울대병원 본원 의료진이 스마트폰 화상으로 원격의료 서비스를 하도록 했다. 현지 의료진은 환자와 분리된 채 생활했으며 엑스레이 검사 등을 실시해 본원으로 전송한 뒤 이상 증세가 발생한 환자를 상급병원으로 이송했다.

코로나19 경증환자가 회복기 치료를 위해 머무는 경기도 생활치료센터의 경우는 분당서울대병원에 설치한 모니터링 본부와 센터 파견팀에서 오전 9시와 오후 5시 하루에 2번 본부 간호사들과 영상통화를 하며 환자들의 건강 상태를 확인받고 상담을 한다. 의사 검진도 이틀에 한 번 원격으로 진행한다.

하지만 여전히 전체 병의원의 95% 정도는 여전히 전화상담 및 원격진료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 실제 환자를 직접 보지 못한 상태에서 오진이 발생할 경우 의료과실인지 장비결함인지 책임 소재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정부가 1차 병원 중심으로 원격의료를 하겠다고 누차 밝혔지만 나중에는 3차 대형병원으로 환자가 몰릴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이 밖에 사이버해킹에 따른 개인 의료정보 누출 염려도 있다.

한 대학병원 전문의는 "의사의 입장에서는 외래 예약 후 환자의 차트를 보고 재확인하는 등 여러 프로세스를 거쳐야해서 (원격의료가) 대면진료보다 더 챙겨야할 게 많다. 지금은 오로지 환자의 편의를 위해서 주먹구구식으로 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박종혁 대한의사협회 대변인은 "임상경험을 쌓고 제도적 보완책도 마련한 후 도입해야 한다"며 "의사 진찰을 거치지 않고 스스로 가벼운 증상이라고 판단하다 큰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원격진료는 의료사고의 위험성이 있고 의료 서비스의 질도 낮아지는 문제를 갖고 있다"며 "국민 편의와 진료비 절감만 내세우기보다 국민 건강을 지킬 수 있느냐 여부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기 고양시 명지병원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운영하는 선별진료소에서 안전한 선별 진료를 위해 1월 28일부터 로봇을 이용한 원격 진료를 시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미국 인터치헬스사가 개발한 이 로봇은 고화질 카메라와 모니터를 탑재하고 줌인, 줌아웃 기능과 와이파이를 통한 스마트폰 등과 연결해 환자의 얼굴과 의료진 얼굴, 타 기기에서 발생하는 신호 확인 등이 가능하다.

하지만 원격진료가 더욱 활발해져 인공지능(AI) 기반의 의료기기가 신의료기술평가를 받아 건강보험에 등재된다면 원격의료가 하나의 디딤돌처럼 신(新)시장을 열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박상준 메디컬아이피 대표는 "미국은 이미 이라크 파병 군인들을 상대로 뉴욕 군병원 의사가 원격 수술을 하는 등 ‘텔레메디슨’이라는 용어가 굉장히 친근하다"며 "과거에는 환자 편의를 위한 근본적 취지를 강조했다면 지금은 원격의료를 통해서 블록체인, 가상의료까지 새로운 시장이 확장되는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우리나라가 의료계 반발에 밀려 원격의료 도입을 주저하는 사이 미국 중국 일본 등은 일찌감치 이를 활용해왔다. 미국에서는 1990년대 초에 본격적으로 도입된 이래, 2014년에 이미 6건 중 1건을 원격으로 진료할 정도로 그 비중이 커졌다. 중국도 알리바바를 비롯해 굵직한 IT 회사들이 뛰어들어 원격진료 서비스 분야가 급성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