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유가 급락으로 유가 연계 레버리지 상장지수증권(ETN)에 투자하는 사람이 늘면서 괴리율(순자산가치 대비 시장가)이 치솟는 등 원유 ETN 시장이 과열되고 있다. 괴리율이 높다는 것은 실제 유가를 반영한 기초지수보다 ETN 가격이 비싸게 형성됐다는 말이다.

같은 상황을 겪고 있는 미국 ETN 시장에서는 발행사가 상품을 조기청산(상장폐지)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으나 국내에서는 ETN 시장에 개입할 수 있는 수단이 없어 한국거래소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4월 인도분 서부 텍사스유(WTI) 가격이 연초 대비 3분 1 수준으로 하락했다.

◇유가 3분의 1토막 나자 ETN 순매수 9배 급증

6일 거래소에 따르면, 국내에 상장된 WTI(서부텍사스유) 연계 레버리지 ETN의 괴리율이 최근 35~40% 넘게 급등했다. 3일 QV 레버리지 WTI 원유 선물 ETN(H)은 전거래일 대비 6.15% 오른 1985원에 마감했다. 지표가치(1408.98)와의 괴리율은 40.88%을 기록했다. 2일에는 괴리율이 90.38%까지 치솟기도 했다. 신한 레버리지 WTI 원유 선물 ETN(H)의 괴리율은 36.33%, 삼성 WTI 레버리지 선물 ETN 괴리율은 35.55%에 마감했다. 두 상품도 한때 괴리율이 60~80% 넘게 올랐다.

평소 원유 레버리지 ETN 괴리율이 5~10% 내외에서 움직이는 것을 감안하면 최근 괴리율 추이는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이는 4월물 WTI 가격이 급락하면서 앞으로 유가가 오를 거란 기대감에 원유 ETN 중에서도 유가 상승분의 2배 수익률을 추구하는 ‘WTI 레버리지 ETN’을 매수하는 투자자들이 급증했기 때문이다. 유동성을 공급하는 증권사(LP)가 적극적으로 매도 주문을 내면서 가격을 진정시키려고 하고 있지만 끊임없이 몰려드는 투자자들 때문에 곧바로 다시 괴리율이 커지고 있다. ETF 시장은 원유 선물 레버리지 상품이 없어 ETN 시장만큼 과열되지 않은 상황이다.

지난 2일 4월물 WTI는 25.32달러로 올해 1월 6일 63.27달러에서 60% 하락했다. 지난달 30일에는 20.09달러로 하락해 18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그 이후 WTI 선물은 21~25달러 선을 오르내리고 있는데, 급락이 조금 진정되는 기미를 보이자 상승에 베팅하는 개인투자자들이 몰리고 있다. 상장된 발행 주식은 한정돼 있는데 수요가 늘면서 괴리율이 대폭 치솟는 수준까지 ETN 가격이 올라가는 것이다.

괴리율이 높아지면 그만큼 잠재적 손실 위험도 커진다. 거래소 관계자는 "괴리율이 지나치게 높아졌을 때 투자하면 추후 괴리율이 정상화되거나 유가가 예상보다 오르지 않을 경우 ETN 매수 당시 괴리율만큼 손해를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장기 투자를 하게 되면 매월 발생하는 ‘롤오버(선물 교체)’ 비용도 만만찮다. 롤오버는 증권사가 매월 ETN의 기초자산인 원유 선물의 만기가 가까워지면 근월물을 팔고 원월물을 사는 방식으로 선물을 이월하는 것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원월물 선물 가격이 현물보다 높으면 원 월물을 사는 과정에서 비용이 발생한다. 특히 지금처럼 유가가 많이 하락한 상황에서 상승 기대감 때문에 선물 가격이 오르면 롤오버 비용은 평소보다 더 많이 발생한다. 원월물 가격이 현물보다 낮으면 오히려 수익이 발생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일은 자주 일어나지는 않는다.

증권사는 롤오버 비용을 ETN 시세에 고스란히 반영하는데 투자 기간이 길어지면 롤오버 비용도 늘어난다. 현재 국내 원유 레버리지 ETN은 상품에 따라 만기가 짧게는 2022년, 길면 2027년까지 남아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도 투자자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매수에 나서고 있다. 잠재적 손실 위험을 감안하더라도 유가가 상승할 때 얻는 이익이 더 클 것이란 기대에서다. 지난달 2일부터 한 달간 개인 투자자는 국내에 상장된 원유 레버리지 ETN 4개 종목을 6455억어치 순매수했다. 이는 지난 2월 한 달간 순매수 규모(703억원)의 9배에 달한다.

ETN 공급자인 증권사들은 괴리율을 낮추기 위해 추가 상장에 나섰지만 수요를 충족시키기엔 역부족이다. 지난 1일 삼성증권은 삼성 WTI 레버리지 선물 ETN 2000만주를 추가 상장해 ETN 물량을 기존 8500만주에서 1억500만주로 늘렸다. 이날 이 상품의 괴리율은 20.72%로 전거래일(41%)보다는 낮아졌지만 다음 날 재차 69.48%로 치솟았다. 추가 상장분을 매도 매도해 과열을 진정시키려고 했어도 효과가 하루 만에 끝난 것이다.

그래픽=송윤혜

◇미국에선 ETN 조기청산 움직임… 국내는 아직 규정 없어

거래소는 원유 레버리지 ETN 상품에 대해 투자유의 안내 공시를 하는 것 외엔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거래소 관계자는 "원유 레버리지 ETN 과열과 관련해 내부적으로 논의를 하고 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 겪는 일이라 매우 당황스럽다"고 말했다.

상황이 비슷한 미국 증시에서는 유가 연계 레버리지 3배 ETN 상품들이 조기 청산되는 사례가 나오고 있다. 벨로시티셰어즈 3배 롱 크루드 오일 ETN(VelocityShares 3x Long Crude Oil ETNs·UWT)은 2일 조기 청산됐다. 이 상품은 S&P GSCI 크루드 오일 지수 상승분의 3배 수익률을 추구하는 상품인데, 최근 유가 급락으로 상장유지규정을 따르지 못할 수준으로 자산가치가 하락해 조기 청산됐다. 이외 프로셰어즈 데일리 3배 롱 크루드 ETN(ProShares Daily 3x Long Crude ETN)도 9일 조기 청산된다.

미국에는 ETN에 가격 변동성 확대에 따른 유동성, 수익성 문제가 발생하면 발행사가 조기 청산을 결정할 수 있도록 하는 규정이 있지만 국내에는 ETN을 조기청산할 수 있는 규정이 없다. 거래소에 따르면 국내에는 투자자가 발행사에 조기 상환을 요청할 수 있는 규정만 있다. 거래소 관계자는 "발행사에 상품 조기 청산을 허용하면 발행사가 임의로 투자 권리를 막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투자자 보호 차원에서 조기 상환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지금은 증권사의 ETN 추가 상장을 장려해 괴리율을 낮추도록 유도하는 것이 현실적인 대안으로 꼽힌다. 거래소는 분기별로 증권사의 괴리율 관리 현황을 파악해 공급자(LP)로서의 능력을 평가한다.

그러나 증권사 대부분이 올해 ETN 발행 한도를 소진한 상황이라 한도를 늘리지 않는 이상 추가 상장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연초 이후 이미 2조2000억원 규모의 유가 레버리지 ETN이 발행됐다. 삼성증권 등 몇몇 증권사들은 한도를 늘리는 방안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증권사가 파산하거나 기초자산 가치가 산출되지 않을 정도로 유가가 급락하지 않는 이상 발행사가 조기청산할 수 있는 권한은 없기 때문에 거래소가 나서서 상장폐지를 요구하지 않는 한 한도를 늘리는 방법밖에 없다"고 했다.

일반적으로 증권사는 괴리율 상승이 나타나면 수익 또한 늘어나기 때문에 발행을 늘릴수록 유리하다. 추가 상장한 물량을 실질가치보다 비싼 가격으로 팔 수 있기 때문에 매도 가격에 따라 고스란히 수익이 잡히는 것이다. 하지만 증권사가 부도가 날 경우 상환이 어려워지면 2008년 리만 브라더스 파산 때처럼 투자자들이 손실을 그대로 떠안아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어 마냥 추가 상장만을 독려할 수 없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한 증권업계 관계자는 "최소한 거래정지 제도나 투자유의종목 지정과 같은 대책 도입이 필요하다"면서 "괴리율이 치솟으면서 상식적인 수준에서 원유 투자를 바라는 투자자들은 아예 진입조차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