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 '지인능욕' 고발하자 "비난하지 마라" 항의 메시지
5000~2만원이면 SNS서 지인 얼굴 합성된 나체 사진 구해
처벌은 '성폭력법' 아닌 '정보통신망법' 적용
전문가 "용어 개념화 따른 법 신설로 처벌 강화해야"

"지인제보방은 이용자들끼리 지인의 사진들을 주고받으면서 아무런 피해자도 만들지 않고 이용자들끼리 조용히 만족하는 공간입니다. n번방과 지인제보방을 엮지 말아 주세요."

지난 23일 소셜미디어(SNS)에 ‘지인능욕’을 고발하는 글을 쓴 한 네티즌은 글을 올린 지 3시간 만에 이같은 항의 메시지를 받았다. 지인능욕이란 주변 여성의 사진을 가공해 음란물로 만들거나, 성희롱 글과 함께 사진과 개인정보를 온라인에 게시하는 것을 말한다.

쪽지에는 "지인제보방의 정체를 드러냄으로써 피해자가 아니었던 사람들이 피해자가 되고, 남녀 사이의 불화와 불신을 만든다"고 적혔다. 불법 음란물 유통을 고발했지만, 오히려 방정보를 공개했다며 항의를 받은 것이다.

지난 22일 페이스북 ‘대학생 너구리’ 페이지에 제보된 텔레그램 ‘지인박제’ 채널. 지인의 신상정보와 합성사진을 공유하는 이 페이지의 구독자는 1322명이다.

최근 불법 성(性) 착취 영상을 촬영하고 유포한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이 논란이 된 가운데, 지인의 얼굴을 불법 성관련 영상과 합성해 유통하는 이른바 ‘지인박제’ 등 디지털성범죄가 발생하는 ‘제 2의 n번방’이 성행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 "능욕할 거리 보내주세요"…5000원에 행해지는 성범죄, 죄의식은 '제로'
24일 조선비즈가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 등에서 '지인능욕' '지인박제' '지인제보' '지인사진' 등의 키워드를 검색해본 결과, 여성의 사진을 선정적으로 가공해 성희롱하는 것은 물론 일반 여성의 얼굴을 다른 사람의 나체와 합성한 사진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이를 전문으로 하는 계정만 수십개가 검색됐다.

의뢰자가 SNS 개인 메시지나 텔레그램으로 신상정보와 사진을 보내면 계정주(主)들은 5000원~2만원의 대가를 받고 합성사진을 만들어주는 식이다. 지인능욕을 무료로 해주겠다고 홍보하는 계정도 있었다.

한 네티즌이 이같은 행태를 SNS에서 지적하자 각종 항의가 쏟아지기도 했다. 페이스북 ‘대학생 너구리’ 페이지에 지난 22일 텔레그램 ‘지인박제’ 페이지의 대화 내용이 공개되자 일부 SNS 이용자들은 "지인제보방은 n번방과 사건의 경중이 다른데 왜 동일시하냐" "그쪽은 지인제보방 사진을 어떻게 구했냐" "대가로 받는 5000원은 도의적 차원에서 받는 것"이라며 항의했다.

최근에는 텔레그램에 대한 단속이 강화되자, 지인능욕 등 디지털성범죄가 일어나는 비밀방이 모바일 메신저 ‘디스코드’로 이동하고 있다. 포털 사이트에서 ‘디스코드 지인’ ‘디스코드 야동’을 검색하면, 각종 불법 성관련 영상을 보거나 공유할 수 있는 서버 링크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서승희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대표는 "이같은 행위는 말 그대로 지인을 능욕하고 이를 통해 성적으로 여성을 정복하고 유린했다는 감각을 얻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면서 "이런 행위를 하는 사람들은 본인이 직접 불법촬영을 하거나 피해자에게 물리적으로 위해를 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경미한 사안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SNS에서 의뢰를 받아 음란 합성사진을 제작해주는 디지털성범죄 계정. 24일 기준, ‘지인능욕’ ‘지인박제’ ‘지인제보’ ‘지인사진’ 등 키워드로만 40여개의 트위터 계정이 검색됐다.

◇신고 건수 '4년 만에 7배', 처벌은 여전히 '솜방망이'…전문가 "처벌 강화해야"
SNS를 중심으로 한 디지털성범죄에 대한 우려가 이어지고 있지만, 이들에게 적용할 수 있는 현행법은 정보통신망법에 따른 명예훼손이나 음란물유포 혐의 정도다. 기존 성폭력처벌법에는 합성사진과 관련된 처벌규정이 없기 때문이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시정요구를 받은 디지털성범죄정보는 총 2만5900건이다. 매일 70건가량의 온라인 게시글이 심의에 걸린 셈이다. 이는 2015년 3636건의 7배에 달한다.

방심위 관계자는 "성폭력 처벌법 제14조에 따른 불법촬영물과 그에 준하는 성 관련 초상권 침해물이 심의 대상"이라며 "2018년부터 방심위 자체 모니터링을 시작해 심의 대상이 대폭 확대된 탓도 있지만 관련 게시글이 전반적으로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반면, 늘어나는 디지털성범죄에 반해 관련 처벌은 여전히 지지부진하다. 법무부에 따르면 2016년 1월부터 2019년 9월까지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 중 음란물유포와 관련해 접수된 사건 1만4365건 중 4.7%에 해당하는 670건만이 정식 재판으로 넘겨졌다. 같은 기간 명예훼손 사건의 기소율도 1.3%에 불과했다. 재판으로 넘겨져도 실형 이상의 형이 선고되지 않고 집행유예나 벌금형 등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다.

정보통신망법의 처벌 규정은 성폭력처벌법보다 약한 탓에 전문가들은 법 규정 신설 등 관련 처벌법이 강화돼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디지털성범죄의 처벌이 약한 것은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라며 "지인능욕 관련 게시물들은 가해자들이 영상이나 사진을 직접 촬영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끔찍한 성범죄가 아닌 소싯적 보던 ‘빨간책’쯤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성 착취의 법률개념화 필요성도 제기됐다. 이 교수는 "지인능욕이라는 말도 용어 자체만 보면 그렇게 끔찍한 것처럼 보이지 않지만 내용에 따라 성 착취물로 분류될 수 있어 성 착취라는 개념부터 법률화해 현실을 왜곡하는 어휘를 새로 고쳐야 한다"라며 "신종 성범죄에 옛 형법을 적용하는 건 옳지 않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