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북부 노이뮌스터에 있는 커뮤니티스쿨(Gemeinschaftsschule Neumünster Brachenfeld) 9학년에 재학 중인 펠릭스 시프터(15)는 수업이 끝나면 디지털 기기 수리업체 ‘미디엄 스카우트 리페어&케어’의 선임 기술자로 활동한다. 2018년 5월 설립된 미디엄 스카우트는 학교 내 ‘학생회사(Schulfirma)’로, 지역 주민의 스마트폰이나 컴퓨터 등을 저렴한 가격에 수리해주고 있다. 그의 친구 막시밀리안 헤닝센은 미디엄 스카우트의 회계사로 최근 합류했다.

학생회사는 학생들이 비즈니스를 직접 경험해 볼 수 있도록 학교 내에 교육적으로 설립된 회사다. 미디엄 스카우트와 같은 학생 회사는 독일 전역에 220여개가 있다. 학생회사 종류는 다양하다. 학교 예산을 활용해 교내 매점을 운영해보기도 하고, 기업과 협업해 제품·서비스를 제작, 판매하기도 한다. 학생들은 이 과정을 거치면서 교실에선 배울 수 없었던 경제금융 지식을 체득한다. 독일 경제교육 비영리단체 'IW 주니어'는 “학생회사는 경제를 배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말했다.

독일 노이뮌스터 커뮤니티스쿨의 학생회사 ‘미디엄 스카우트 리페어&케어’에서 활동하는 학생들 모습.

독일 사례에서 보듯, 선진국 금융교육의 제1 목표는 실용성이다. 고리타분한 경제학 이론만 가르치지 않고 당장 현실에서 마주할 수 있는 상황에 대비해 현명한 소비자를 길러내는 것이 목적이다. 2017년 싱가포르 경제학회(ESS)에서 ‘뛰어난 경제학 교사상’을 수상한 한 고등학교 교사는 “지금 한국에서 배우는 경제학은 교실과 분리돼 있다. 우리의 역할은 실제 사례를 활용해 학생들이 경제학을 느낄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고 했다.

사회, 수학, 외국어 등 다양한 학문에 금융을 결합해 ‘총체론적 관점’을 길러주는 것 역시 선진국 금융교육의 특징이다. 학문적 경계를 허물어 다양한 관점에서 실물 경제를 바라볼 수 있도록 교육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금융교육을 의무화하고 체계를 잡아나가는 정부 기관과 민간 협회 등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교사 역량에 따라 극과 극의 차이를 보이는 한국의 금융교육과는 달리, 선진국 금융교육은 점차 고도화되고 있다.

◇학자금 대출 증가에 ‘부채 관리법’ 가르치는 美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지난해 12월 작성한 ‘주요 선진국의 경제교육 동향과 시사점’ 보고서에 따르면, 최근 미국 금융교육에서 가장 큰 화두는 ‘학자금’과 관련돼 있다. 지난해 말 기준 미국 학자금 대출은 1조5100억달러(약 1838조원)로, 전년 대비 510억달러 늘었다. 학자금 대출이 전체 가계부채(14조1500억달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주택담보대출(9조5600억달러) 다음으로 높다. 미국 학자금 대출은 대부분 정부 대출이라 부실화되면 소비 위축은 물론 정부 재정까지 악화돼 심각한 위기가 올 수 있다.

미국 교육계는 이같은 추세를 반영해 생활 중심의 금융교육을 강화하고 있다. 미국 특성상 주(州)마다 교육 내용은 차이가 있지만, 대학 진학에 필요한 학자금 마련 방안부터 장학금·학자금 신청하기, 소득 신고와 세금보고서 작성법 등을 가르치는 주가 늘어나고 있다. 학자금을 위해 부채를 질 수밖에 없다면, 최대한 현명하게 부채를 관리할 수 있도록 대학 입학 전에 훈련시키기 위해서다. 이 외에도 중학교 때부터 신용·부채 관리법, 금융기관 활용법 등을 교육하고 있다.

그래픽= 박길우

영국 정부가 정의하는 금융 역량은 ‘일상 및 평생에 걸쳐 돈을 잘 관리하는 능력’이다. 이에 따라 영국 역시 실용성 위주의 금융교육을 실시하는데, 초등학생 때는 돈의 역할과 안전한 보관법, 가정의 수입과 지출 등 일상 생활에서 접할 수 있는 소재로 공부한다. KDI는 “한국의 경우 초등학생에게도 경제학 원론의 첫 페이지에 등장하는 희소성과 합리적 선택을 가르치려 하는데, 영국은 학생들 입장에서 이해하기 쉬운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주제에 대해 접근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영국 금융교육의 실용성은 사회 진출 직전 단계인 16~18세에서 극대화된다. 상품과 숙박 등 임차 계약 과정을 이해하는 내용부터 시작해 처음으로 집을 떠나 살아갈 때를 대비해 예산 계획 세우는 법을 배운다. 연금을 일찍부터, 꾸준히 납부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좋은’ 부채와 ‘나쁜’ 부채도 구별할 수 있게 된다. ‘부채는 악(惡)’이라고만 가르치는 한국식 교육과는 다른 점이다.

◇단일 과목 대신 영어, 수학과 함께 ‘총체론적’ 교육

금융을 따로 분리해 교육하기보다는 다른 과목과 통합해 가르친다는 점도 선진국 금융교육의 특징이다. 싱가포르의 초등학교와 중학교 교육과정에서는 ‘경제교육’이라는 용어 자체가 나오지 않는다. ‘경제학’이라는 별도 과목이 존재하지 않는데다, 금융만을 다루는 별도의 정규 수업시간도 없다. 지난 2014년 싱가포르 교육부가 교육과정을 개정하면서 “여러 학문과 다양한 활동을 통해 금융교육을 실시해야 한다”고 권고한 데 따른 것이다.

싱가포르는 사회, 수학, 영어 등의 과목에 금융 관련 단원이나 주제가 섞여있다. 학문적 경계가 없다보니 다양한 관점에서 금융을 바라볼 수 있고, 오히려 이론보다 실생활 위주의 금융교육이 가능하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싱가포르 초등학교의 인성·시민성 과목에서는 ‘책임 있는 의사결정’ 단원에서 시간·자금 관리를 배운다. 한정된 시간과 돈을 우선순위에 따라 배분하는 과정에서 ‘효율성’이라는 개념을 체득하는 것이다.

그래픽= 박길우

영국 역시 의무 교육과정에서 금융교육을 여러 과목에 분산해 놓고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금융교육 시간이 부족하진 않다. 지난 2018년 영국 자금관리자문청이 각 공립학교 금융교육 담당 교사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는데, ‘학생들에게 금융교육을 얼마나 제공하고 있는가’라고 질문하자 15%가 ‘많이’, 60%가 ‘어느정도’라고 답했다. 금융교육을 제공하지 않는다고 답한 응답자는 2%에 불과했다.

이들 선진국이 다른 과목에 금융을 결합해 가르치는 것은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이미 많은 교과목이 존재하고, 중요한 과목은 정해져 있는 상황에서 금융을 위해 추가 시간을 확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에 별도의 금융 과목이나 단원을 마련하기보다는 금융 관련 내용을 다른 과목에 접목시킨 것이다. 대학 입시철이 가까워질수록 예체능 수업까지 모두 국·영·수 수업으로 대체하는 한국 상황에서는 이같은 방안이 해결책이 될 수 있다.

◇체계적 금융교육, 추진 주체에 달려있다

선진국은 초등학교 때부터 체계적인 금융교육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교육 과정을 체계적으로 잡아나가고 있다. 그 체계를 세우는 곳은 정부와 민간 협회, 국회 등 다양하다. 미국의 경우 70년 역사를 자랑하는 경제교육협의회(CEE)가 대표적이다. CEE는 전국 240여개 지역센터를 통해 교사 연수와 프로그램을 학교에 제공하고 있다. 해마다 5만5000명 이상의 교사가 CEE가 제공하는 전문성 향상 프로그램에 참여 중이다.

CEE 노력에 힘입어 미국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각 주 소관이었던 교육정책의 한계를 극복하고 연방 차원의 학교 금융교육을 강화하고 있다. 2018년 기준 미국 45개 주가 교육과정에 개인금융 교육 기준을 마련했고, 이 기준을 실행하는 주 역시 38곳에 달한다.

싱가포르 금융교육 운영위원회(FESC)가 운영 중인 ‘머니센스 금융 건강 점검 프로그램’ 독려 포스터.

싱가포르에는 통화감독청과 교육부 협업으로 탄생한 금융교육 운영위원회(FESC)가 있다. FESC의 대표작은 전국민 금융교육의 목적으로 2003년에 만든 ‘머니센스(MoneySENSE)’ 프로그램이다. 머니센스는 매번 캠페인의 주제를 정해 진행하는데, 2018~2019년의 경우 건강한 금융활동을 위해 만들어진 ‘금융 건강 점검 프로그램’에 고등학생의 참여를 독려하는 내용이었다.

한국의 경우 경제교육 과제를 힘있게 추진할 만한 기관이나 협회가 마땅치 않은 실정이다. 지난 2008년 기획재정부 지원을 통해 한국경제교육협회가 설립됐지만 2014년 보조금 횡령 의혹이 불거져 2015년에 해산됐다. 현재 한국경제교육단체협의회가 있지만 2017년 설립돼 아직 그 존재감은 미미한 상황이다. 금융감독원이 금융교육 사업을 벌이고 있긴 하지만, 교육부 등에 비해 권한이 부족해 그 효과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