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경제관료]
낮은 급여·불확실한 미래·사기 저하가 이유
과장 5명 중 1명만 "향후 장·차관 하고싶다"

경제 관료들이 흔들리고 있다. 국가의 백년대계를 만든다는 자부심과 명예, 그리고 애국심은 민간에 미치지 못하는 처우에도 이들이 계속 공직 생활을 할 수 있는 이유였다. 이들이 만들어낸 정책은 그간 한국의 경제 성장을 이끌어 나가는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현 정부 들어 경제 관료가 청와대에서 내려오는 정책을 ‘수행’하는 역할에 그치고 있다는 인식이 공직 사회 전반에 퍼지고 있다. 민간의 힘이 점차 강해지면서 경제 관료의 주도적인 역할이 줄고, 관료들도 이런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 일부 경제 관료들은 공직 생활에 대한 무력감, 심지어는 패배감을 느끼고 있다.

조선비즈는 경제 관료의 중추라고 할 수 있는 각 부처 과장급 간부를 대상으로 1월 29일부터 2월 7일까지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기획재정부, 산업통상자원부, 국토교통부, 농림축산식품부, 해양수산부, 공정거래위원회, 금융위원회 등 7개 부처 팀장 보직이 있는 서기관 이상 500명을 상대로 조사를 실시해 이 중 100명(응답률 20%)의 응답을 취합했다. 응답 결과는 경제 관료의 사회적 역할과 위상을 제고하는 데 필요한 소견서가 될 것이다. 경제 관료들의 현실 인식을 시리즈 기사로 풀어본다. [편집자주]

정부서울청사에서 공무원을 비롯한 관계자들이 점심을 마치고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제정책을 만드는 경제부처의 과장(서기관)급 간부 10명 중 8명 이상이 "민간으로 이직하고 싶다"는 마음을 품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낮은 급여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사기 저하가 주요 요인인 것으로 집계됐다. 간부들 중 60%는 ‘다시 진로를 선택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공무원을 하겠느냐’는 질문에 "아니다"라고 답했다.

경제부처 과장 10명 중 7명은 ‘승진보다는 저녁이 있는 삶’을 원하고 있다. 또 ‘장래의 장·차관’을 꿈꾸는 과장들보다 국장급 정도에서 공직을 마무리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과장들이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공직 수행을 보람있게 생각하는 과장들보다 피로감을 호소하는 과장들이 더 많은 공직사회의 현 주소가 드러난 셈이다.

20일 조선비즈가 기획재정부 등 7개 경제부처 과장(서기관)급 이상 100명을 상대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정년 퇴임 전 민간으로 이직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직할 생각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72명(73.5%)는 ‘조건에 따라 이직할 생각이 있다’고 답했다. ‘무조건 이직하고 싶다’는 응답은 11명(11.2%)명이었다.

그래픽 = 박길우 디자이너

조건이 좋아도 이직할 생각이 없다는 공무원은 15명(15.3%)명에 불과했다. 경제 정책을 총괄하는 기재부만 보면 ‘민간으로 이직하고 싶다’는 응답은 91.9%로 전체 평균 대비 비중이 컸다. 공직에 입문해 최소 15년 이상 관료생활을 했던 과장급 간부들이 민간 이직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경제 부처 과장들이 민간 이직을 고민해보는 이유는 크게 ‘낮은 급여’(33.3%)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27.2%), 사기 저하(27.2%) 등 세가지였다. 갈수록 벌어지는 민간 기업과의 임금 격차가 이직을 고민하는 주된 원인 중 하나였다는 것이다.

인사혁신처에 따르면 민간 대비 공무원 보수 수준은 지난 2018년 기준 85.2%였다. 2000~2009년 90%안팎으로 움직였던 민간 대비 공무원 보수 수준이 2010년 80%대 초중반으로 주저앉은 후 90%대를 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흔히 ‘안정적인 직장’으로 꼽히는 공직에 있음에도 미래가 불확실하다고 느끼고 있다. 우석진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보통 국민들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공직을 선호하는데, 상황이 안정된 과장들도 같은 이유로 민간 이직을 희망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고 말했다.

기타 답변 중에는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다’는 것 외에도 공직 생활에 대한 회의감이 드러나는 응답이 많았다.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공직 인사제도’ ‘공무원으로서 일한다는 자부심이 줄었기 때문’ ‘(공무원 생활이)인생 바쳐서 할 일이 아니다’ 등의 답변이 있었다.

‘진로를 다시 선택할 기회가 생긴다면 공무원을 택하겠는가’라는 질문에는 98명이 응답했는데, ‘다른 일을 해보고 싶다’는 답변이 58명(59.2%)로 과반수를 넘었다. 다시 진로를 택해도 공무원을 하겠다는 답변은 40명으로 전체의 40.8%였다.

그래픽 = 박길우 디자이너

민간기업에서 일하고 있는 한 전직 관료는 "공무원들이 급변하는 시장에서 도태될 것이란 두려움을 느끼는 상황에서 공직에 대한 자부심과 승진 희망, 업무 보람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면서 "이 때문에 기회가 되면 이직해야겠다는 생각이 확산 중이고, 이런 생각은 경제 정책총괄을 맡고 있는 기재부에서 뚜렷한 것 같다"고 분석했다.

사기 저하와 진로에 대한 불확실성 등은 관료들이 그리는 자신들의 미래에도 영향을 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공직 생활의 최종 목표를 묻는 질문에 과장들 23.9%(22명)만 장·차관으로 마무리하고 싶다고 답변했다. 응답자의 48.9%(45명)는 ‘차관보·실장급’, 27.5%(25명)는 국장급에서 공직 생활을 마무리하고 싶다고 했다.

한 전직 관료는 "중앙 경제부처 과장들은 대체로 출세지향적인 성향을 갖고 있는데, 국장에서 공직을 마무리하고 싶다는 응답이 장·차관을 하고 싶다는 응답보다 많은 것은 의외의 결과"라면서 "공직에 대한 피로감이 상당한 수준에 이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래픽 = 박길우 디자이너

‘승진이 다소 늦어지더라도 저녁이 있는 삶과, 저녁이 없더라도 승진이 빠른 삶’을 골라보라는 질문에 응답자의 72.3%가 ‘승진이 다소 늦어지더라도 저녁이 있는 삶’을 골랐다. 나머지 27.7%가 ‘저녁이 없더라도 승진이 빠른 삶’을 택했다. 과거에는 야근을 많이 하더라도 요직으로 꼽히는 부서로 가서 실력을 발휘하고, 능력을 인정받아 빨리 고위직으로 가고 싶어하던 것이 공직 사회의 주된 분위기였다.

한 전직 고위 관료는 "이직하고 싶다는 응답과 승진보다 저녁을 택하겠다는 것은 현재 공무원의 위상 변화를 잘 보여주고 있는 부분"이라고 짚었다. 공무원 생활에서 느끼는 보람이 적어진 것이 이 응답 결과에 고스란히 드러난다는 해석이다. 여기에는 최근 들어 일과 삶의 균형을 의미하는 ‘워라밸(워크-라이프 밸런스)’ 추구 문화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한 경제학과 교수는 "최근에 과장들이 사무관들에게 ‘너희들은 일·가정 양립에서 ‘일’은 없지 않느냐’(일에 몰입하지 않는다는 의미)고 핀잔을 주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데, 정작 본인들도 일·가정 양립을 원한다는 점이 눈에 띈다"고 말했다.

그래픽 = 박길우 디자이너

이번 설문에는 응답자 100명 중 기획재정부 소속 과장이 38명으로 가장 많았다. 이어 공정거래위원회 16명, 국토교통부 15명, 산업통상자원부 11명, 금융위원회 9명, 농림축산식품부 6명, 해양수산부 5명 등 우리나라 주요 경제 부처 소속 공무원들이 설문에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