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 배터리 기술 유출을 둘러싼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의 소송전에서 LG화학이 승기를 잡았다.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가 영업비밀 침해를 근거로 SK이노베이션에 ‘조기 패소판결(Default Judgment)’을 내리면서 LG화학의 손을 들어줬기 때문이다.

이번 결정으로 SK이노베이션은 당초 내달 초로 예정됐던 변론(Hearing) 절차 없이 오는 10월 ITC의 최종 결정을 받아들여야 한다. 최종 결정에서 패소판결이 확정되면 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 부품·소재에 대한 미국 내 수입 금지 효력이 발생한다.

LG화학의 승소 가능성이 높아짐에 따라 향후 분쟁의 향방에 대한 업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위기에 몰린 SK이노베이션이 LG화학에 화해 협상을 시도할 것이라는 전망에도 힘이 실리고 있다.

LG화학 제공

◇LG·SK 배터리 분쟁 10개월…승기 잡은 LG화학

LG와 SK간 배터리 분쟁은 ‘인력과 영업비밀 빼가기’ 논란에서 출발했다. LG화학은 "SK가 2년간 100명에 가까운 인력을 빼가는 과정에서 핵심 기술과 영업비밀이 다량 유출됐다"며 지난해 4월 미국 ITC와 델라웨어주 연방지방법원에 SK이노베이션을 영업비밀 침해로 제소했다. 5월에는 산업기술 유출 혐의로 SK를 서울지방경찰청에 고소했다.

SK이노베이션은 LG화학의 소송에 반격해 지난해 6월 서울중앙지법에 명예훼손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고, 9월에는 미국 ITC와 연방법원에 특허 침해 혐의로 대응했다. SK는 LG의 배터리 사업 경력사원 100여명을 채용한 것은 인정하면서도 "100% 공개채용 방식이었고 부당하게 인력을 빼가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에 LG화학도 ITC와 델라웨어 법원에 각각 특허침해와 손해배상 맞소송을 제기했다. 양사 최고경영자가 지난해 9월 만났으나 합의를 끌어내지는 못했다. 두 기업 모두 전기차 배터리를 미래 먹거리로 삼고 시장 선점에 사활을 걸고 있는 만큼, 한 발도 양보하지 않고 팽팽하게 맞섰다.

그래픽=정다운

사태는 LG화학이 지난해 11월 ITC에 'SK이노베이션의 조기 패소 판결을 내려달라'고 요청하면서 새 국면을 맞았다. LG화학은 "SK이노베이션이 자료 삭제를 지시하는 등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광범위한 증거인멸을 지속했고, 포렌식 명령도 이행하지 않았다"며 강도 높은 제재를 내려달라고 요청했다.

ITC는 3개월 만에 LG화학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ITC 불공정수입조사국(OUII)이 제출한 SK이노베이션의 증거인멸 정황을 인정한 의견서가 판결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SK, 美에 2조 들여 공장 지었는데 패소 위기

이번 조기패소 판결은 양사가 진행 중인 배터리 소송 6건 가운데 처음으로 나온 예비판결로, 향후 분쟁의 흐름에도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현재로서는 SK이노베이션이 불리한 입장이다. ITC 통계자료(1996~2019년)에 따르면, 영업비밀 소송은 ITC 행정판사가 침해를 인정한 모든 사건(조기패소결정 포함)이 ITC 위원회 최종결정에서 그대로 유지됐다. 특허소송의 경우 90%가 ITC 위원회 최종결정으로 이어졌다. 이번 영업비밀침해 소송에서도 조기패소판결 내용이 최종결정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크다.

ITC 홈페이지 조기패소판결 화면 캡쳐

SK이노베이션이 최종 패소할 경우 미국 배터리 사업이 위기에 몰리는 만큼 조만간 LG화학 측과 합의를 시도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SK이노베이션은 2조원을 들여 폴크스바겐에 공급할 배터리 공장을 미국 조지아주에 짓고 있다. 최종 패소로 미국 내 SK이노베이션 배터리 부품·소재 수입이 금지될 경우 미국 사업을 접게 될 수도 있다.

미국 내 공장을 늘려 일자리를 만들고 싶어하는 트럼프 행정부가 ITC 소송 결과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오지만, 실현 가능성은 희박한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그간 ITC 소송 전례를 보면, 최종결정 직전 양사간 합의로 소송이 마무리되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양사가 합의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

SK이노베이션은 16일 낸 입장문에서 "ITC로부터 공식적인 결정문을 받아 검토한 후, 향후 법적으로 정해진 이의절차를 진행해 나갈 방침"이라며 "LG화학과는 선의의 경쟁관계이지만, 산업 생태계 발전을 위해 협력해야 할 파트너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 기조는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LG화학은 "이번 소송의 본질은 30여년 동안 축적한 당사의 소중한 지식재산권을 정당한 방법으로 보호하기 위한 데 있다"면서 "LG화학은 2차전지 관련 지식재산권 창출과 보호를 지속 강화해 글로벌 전기차 배터리 시장을 선도해 나가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