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중희 퓨처플레이 대표

작년 2월, 나는 스페인에서 열린 세계 최대 모바일 전시회 'MWC(모바일월드콩그레스)'때 미국 마이크로소프트(MS)가 펼친 증강현실(AR) 기기 '홀로렌즈2' 공개 행사를 유튜브로 지켜봤다. MS의 신제품에 대한 궁금증도 있었지만, 여기에 등장할 인물 때문이었다.

행사 도중 AR 기술 스타트업 '스페이셜(Spatial)'의 이진하 최고제품책임자(CPO) 겸 공동창업자가 무대에 홀로그램으로 등장했다. 그는 전 세계가 지켜보는 무대에서 미국과 스페인을 AR로 실시간 연결했다. 서로 떨어진 곳에 있는 두 사람이 한 공간에 있는 것처럼 AR로 구현한 제품에서 설계도를 공유할 뿐 이나라 동시에 수정·보완도 할 수 있었다. 화상회의·채팅에선 구현할 수 없는 미래 업무 환경을 시연했다.

하지만 내가 스페이셜에 첫 번째로 투자한 이유는 기술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첫 번째 투자'를 업으로 하는 내겐 이 기술을 볼 기회가 없었다. 판단 기준은 오직 처음 모여 있는 몇 명, 그리고 시작도 하지 않은 미래를 그린 희미한 청사진뿐이었다. 이 중 가장 믿을 수 있는 건 뭘까. 회사 성장 과정에서 사람들은 바뀌지만, 0에서 1(Zero to One)을 만들어 내는 과정만 보면 중심 인물은 바뀌지 않는다. 바로 스페이셜은 사람을 믿고 투자한 경우다.

2016년 가을이었다. 당시 나와 아내는 어린 딸을 유모차에 태우고 양재천을 찾았다. 산책 도중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류중희 박사님 아니세요? 반갑습니다!" 이진하 CPO였다. 그를 단순히 도쿄대(학사)와 MIT(석사)를 나온 인재라고만 소개하긴 아쉽다. 천재라는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 중 하나다.

지난해 스페인 MWC에서 열린 미국 마이크로소프트의 신제품 공개 행사 때 이진하 스페이셜 CPO 겸 공동창업자가 홀로그램으로 등장했을 때 장면.

그는 인간과 기계의 상호작용을 새로운 단계로 끌어올린 연구를 했고, 그 결과를 대중이 쉽게 이해하도록 설명할 줄도 알았다. 당시 그가 한 대기업에 국내 최연소 수석연구원으로 입사해 핵심 프로젝트를 맡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그는 "대기업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요즘 어때요?"라는 내 안부 인사에 "뭘요, 그나저나 저 새로운 아이디어로 창업을 생각하고 있어요"라고 했다.

그 순간 투자자로서의 촉이 살아났다. 그의 새 사업에 꼭 투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바로 그와 함께 창업을 준비하던 아난드 아가왈라도 만났다. 두 사람은 세계적 지식 콘퍼런스 '테드(TED)'에서 만난 사이였다. 아난드는 2010년 구글에 인수된 소프트웨어 스타트업 '범프톱(BumpTop)'의 창업자이기도 했다.

천재라고 여겨온 사람과, 그가 인정하는 또 다른 천재가 함께 사업을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구글에 엑시트(exit·투자 회수) 경험까지 있는데, 뭘 할는지는 몰라도 투자해야 한다는 생각이 굴뚝같았다.

그로부터 4년 뒤, 천재 두 명의 아이디어는 지금의 스페이셜로 성장했다. 작년 MWC에서 화려하게 신호탄을 날린 스페이셜은 최근 AR 분야 스타트업으로는 최대 규모인 1600만달러의 추가 투자를 유치했다. 물론 이들의 AR 협업 도구가 아직 피부에 와닿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애플이나 삼성 등이 AR 기기를 스마트폰만큼 널리 퍼뜨릴 때, 가장 많이 쓰일 소프트웨어 중 하나는 스페이셜이 될 것이라고 난 믿는다. 이들은 전 세계에서 AR 분야를 가장 잘 알고, 가장 많이 고민하고, 가장 훌륭한 방법으로 풀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