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프로야구 명문 구단인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홈구장 정도로만 알려져 있던 도쿄돔이 난데없이 이달 들어 전 세계 투자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홍콩계 행동주의(activist) 펀드인 '오아시스 매니지먼트'가 지난달 30일 도쿄돔을 운영하는 '도쿄돔 코퍼레이션'에 대해 경영 개선을 요구하는 보고서를 발표했기 때문이다. '더 나은 도쿄돔을 위해'라는 제목의 보고서에서 오아시스 측은 "도쿄돔 코퍼레이션이 도쿄 중심가에 최대 5만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돔구장과 대형 놀이동산, 객실 1000개를 갖춘 호텔 등 복합 시설물을 갖고 있으면서도 방만한 경영으로 순이익이나 주가를 개선시키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입장료와 이용료를 올리고 놀이동산 시설을 개조하는 등의 변화를 꾀할 경우 현재 77억엔 수준인 순이익을 2021년에 148억엔으로 대폭 높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일본 언론들은 "도쿄돔과 주변 시설을 누가 운영하는지도 모르던 많은 일본인이 오아시스 측 주장에 깜짝 놀랐다"고 전했다.

지난 7일에는 미국계 행동주의 펀드인 엘리엇 매니지먼트가 25억달러(약 3조원)를 투자해 일본 최대 IT 기업인 소프트뱅크의 주식 3%를 사들였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들이 이미 손정의 회장과 소프트뱅크 비전펀드를 이끄는 라제프 미스라 부사장 등을 만나 투자 결정 과정의 투명성 제고 등을 요구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그러자 이날 한때 소프트뱅크의 주가는 전일 대비 8% 이상 급등해 6개월 만에 5000엔 선 위로 올라섰다.

◇행동주의 펀드의 타깃 된 일본 기업들

일본 기업을 노리는 행동주의 헤지펀드가 늘고 있다. 행동주의 헤지펀드란 주주권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경영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수익 실현을 추구하는 펀드다. 단기적으로 주주 가치를 높이는 자사주 매입과 배당 확대, 지배구조 개선, 저수익 사업 매각 등을 주로 요구한다. 지난해 1600억엔(1조7300억원) 상당의 소니(SONY) 주식을 사들인 미 서드포인트는 반도체 사업의 분리·독립을 요구하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일본 기업들이 주주들의 권리를 중시하기 시작하면서 한때 불모지였던 일본 주식 시장이 (행동주의 펀드의) 가장 유망한 투자처로 주목받고 있다"고 했다.

노무라증권에 따르면, 2019년 행동주의 펀드가 보유한 일본 주식은 약 3조4000억엔으로 집계됐다. 최근 5년 만에 두 배로 늘었다. 같은 기간 행동주의 펀드의 일본 외 국가 주식 보유액이 36조엔에서 24조엔으로 줄어든 것과 대조된다. 2019년 주주 제안을 받은 기업 수도 54개(컨설팅회사 IR재팬 집계)로 역대 최대 기록을 세웠다. 올림푸스, 기린, 도쿄돔 코퍼레이션 등 알 만한 기업 상당수가 타깃이 됐다.

올 들어서도 행동주의 펀드의 일본 투자는 이어지고 있다. 영국에선 일본 중견 기업을 대상으로 한 약 2억파운드(약 3100억원) 규모 행동주의 펀드인 '일본 액티브밸류펀드'가 만들어졌다.

◇저성장 늪 빠진 현금부자 기업이 타깃

행동주의 펀드의 일본 진출은 저성장 늪에 빠진 일본 기업을 노린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최순영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일본 기업은 고도 성장기에 현금을 많이 비축했지만, 오랜 경기 불황과 경직된 기업 문화 때문에 신성장동력을 찾지 못해 수익성이 낮은 게 특징"이라며 "행동주의 펀드들이 이런 비효율의 틈을 노린 것"이라고 말했다.

2012년 2차 집권에 성공한 아베 신조 내각이 일본 기업의 체질 개선을 추진한 것도 행동주의 펀드 투자에 우호적인 환경을 만들었다. 아베 정부는 집권 초 출간한 '이토 리포트'를 통해 "일본 기업이 과도한 현금·자산 보유 문제를 해소하고 수익성을 제고해 자기자본이익률(ROE)을 높여야 한다"고 밝혔다. 2014년에는 금융청이 일본판 스튜어드십 코드(기관투자가의 의결권 행사 자율지침) 가이드라인을 만들었다. 2015년엔 사외이사 및 감사 제도, 외국인을 위한 영어 공시 등을 도입한 기업지배구조원칙 모범규준이 도입됐다.

행동주의 펀드에 대한 일본 내 평가는 우호적인 편이다. 이들이 투자한 기업들이 주주친화적인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 노무라증권이 행동주의 펀드가 5년간 주식을 보유한 기업 37곳을 분석했더니 주주에 환원한 금액이 3.7배 늘었다. 반면 행동주의 펀드가 투자하지 않은 2664개사의 경우 주주 환원이 2.6배 늘어나는 데 그쳤다. 닌텐도는 행동주의 펀드의 대표적인 '윈-윈(win-win)' 사례로 꼽힌다. 이번에 도쿄돔에 투자한 오아시스 매니지먼트의 강력한 요구 덕분에 닌텐도가 모바일 게임 개발에 착수했고, 이게 '포켓몬고 신화'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경계의 시선도 여전하다. 이들이 이익 실현을 위해 요구하는 내용이 꼭 기업 장기 성장 비전에 들어맞는다는 법이 없어서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경영권 방어에 지나치게 자원을 쏟아부어 기업이 피폐해지거나 상장폐지 등 과잉방어에 나서는 역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고 전했다. 최순영 연구위원은 "한국도 일본처럼 저성장과 사내 유보금 증가, 신성장 동력 미발굴 등 행동주의 펀드에 유리한 환경으로 변하고 있다"면서 "한국 기업들은 지배구조나 수익성 이슈를 선제적으로 점검하고 합리적인 경영으로 평소 주주의 신뢰를 얻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