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애플은 미국 법무부와 대놓고 싸우고 있다. 작년 12월 미국 플로리다주 해군기지에서 사우디 공군 소위가 총기를 난사해 3명이 숨진 사건이 발생했는데, 미 법무부가 사우디 소위의 아이폰 잠금장치를 풀지 못한 것이 발단이다. 애플은 고객 프라이버시 보호를 이유로 법무부의 잠금해제 요청을 거부하고 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까지 나서 "나는 애플을 많이 도왔다. 이제는 애플이 우리를 도와야 한다"며 압박했다. 그래도 애플은 요지부동이다. IT 업계 관계자는 "애플은 정부에 협조하는 순간 고객 프라이버시 보호 포기의 의미로 해석돼 고객들에게 외면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페이스북·구글·애플·아마존 등 IT 기업이 제품 사용자의 프라이버시 보호에 사활을 걸고 있다. 각종 사용자 데이터가 클라우드(가상 저장공간)에 모이고, 기기들이 서로 연결되는 '커넥티비티' 시대에 프라이버시 보호는 단순히 고객 개인 정보 보호 차원을 넘어 회사의 명운(命運)까지 결정지을 수 있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IT 기업 프라이버시 보호 '올인'

애플은 이달 초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IT 전시회인 'CES'에 28년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첨단 제품 전시가 아니라 프라이버시 보호 정책 토론회인 '개인정보 책임자 원탁회의'에 참가하기 위해서다. 애플의 제인 호바스 글로벌 개인정보보호담당 수석 이사는 토론회에서 "애플은 제품 설계 단계부터 프라이버시를 고려하며, CEO인 팀 쿡부터 회사 전체에 프라이버시 최우선 문화가 정착돼 있다"고 강조했다.

페이스북 프라이버시 담당 임원도 같은 토론회에서 새로운 '프라이버시 체크업' 버전을 발표했다. 사용자가 자신의 정보가 어떻게 사용되는지 직접 확인하고, 자기 게시물의 공개 범위도 설정할 수 있는 기능이다. 페이스북은 최근 사용자가 자신의 인터넷 검색 기록을 페이스북이 수집하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기능도 도입했다. 페이스북은 그동안 사용자의 인터넷 이용 기록을 수집해 맞춤형 광고를 해왔는데, 프라이버시 침해 논란이 불거지자 새 기능을 탑재한 것이다.

구글 역시 프라이버시 보호를 위해 인공지능(AI) 음성인식 비서인 구글 어시스턴트에 새로운 기능을 도입했다. "헤이 구글, 이건 널 위한 게 아니야"라고 말하면 구글 어시스턴트가 현재 듣고 있던 말을 기록하지 않는 것이다. 또 "이번 주에 내가 말한 모든 것을 지워줘"라고 하면 저장됐던 음성 명령이 모두 삭제된다.

삼성전자도 CES에서 TV 사용자의 프라이버시 보호를 위한 '프라이버시 초이스' 앱을 공개했다. TV가 어떤 유형의 데이터를 수집하는지 사용자가 직접 확인하고, 이를 차단할 수 있다. 또 모바일 보안을 위해 만든 보안 플랫폼(기반기술) 'KNOX(녹스)'를 스마트폰뿐만 아니라 가전과 TV 등 전 기기로 확대하기로 했다. 미 IT 전문 매체인 테크크런치는 "그동안 사용자 데이터 수집과 이에 근거한 맞춤형 광고에 열 올리던 IT 업체들이 프라이버시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있다"고 보도했다.

◇하나 뚫리면 모조리 털려

IT 업체가 프라이버시 보호에 집중하는 이유는 광범위하게 수집한 사용자 개인 정보 등을 클라우드에 일괄 보관하면서 해킹 위험이 커졌기 때문이다. 클라우드 하나가 털리면 그동안 모은 모든 정보가 한순간에 유출된다. 최근 국내에서 배우 주진모씨의 삼성 클라우드 접속 아이디와 비밀번호가 유출돼, 클라우드에 저장돼 있던 사진과 카카오톡 메신저 대화 내용까지 외부로 드러난 사건이 대표적이다. 사물인터넷(IoT)이 보편화한 것도 이유다. 과거에는 전자기기가 해킹당하면 개별 기기에만 영향을 미쳤지만, 지금은 사물인터넷을 통해 모든 기기가 서로 연결돼 있어 피해는 훨씬 커진다. IT 업계 관계자는 "스마트 스피커를 통해 침입해 전체 스마트홈 시스템을 해킹하는 사례도 등장하고 있다"고 했다.

사용자의 개인 정보를 활용해 돈벌이를 해온 IT 기업의 행태에 대한 비판 여론도 또 다른 배경이다. 2016년 미국 대선 때 페이스북은 회원 8700만명의 정보를 유출했다가 50억달러 벌금을 맞았다. 유튜브는 작년 광고 수익을 위해 13세 미만 사용자의 정보를 수집했다가 1억7000만달러 벌금을 냈다. 시장조사기관 스태티스타는 전 세계 인터넷 사용자들의 프라이버시에 대한 관심도가 최근 1년 사이 53% 높아졌다고 밝혔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최고법률책임자인 브래드 스미스 사장은 최근 자신의 링크트인 계정에 "2020년대에는 기업들이 사용자의 정보를 어떤 목적으로 활용하는지에 대한 강도 높은 규제가 적용될 것이고. 이에 대응하는 기업들의 움직임도 활발해질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