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수환 전 WBA 주니어페더급 챔피언

롯데그룹 창업주인 신격호 명예회장이 19일 별세했다는 소식을 듣고 42년 전 일이 떠올랐다. 1978년 2월 1일 나는 일본 선수 가사하라 유와 세계복싱협회(WBA) 주니어페더급 1차 방어전을 치렀다. 일본 도쿄에서 열린 이 경기에서 나는 다섯 차례 다운을 빼앗은 끝에 15회 판정승을 거뒀다. 당시 내 트렁크 오른쪽 아래에는 한글로 '롯데'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다음 날 나는 도쿄에서 카퍼레이드를 했다. 한국 선수가 일본에서 일본 선수를 꺾었는데 카퍼레이드라니…. 신 명예회장이 나를 위해 준비한 행사였다. 그 행사에는 재일(在日) 한국 어린이들도 함께했다. 카퍼레이드를 마친 뒤 그야말로 '눈탱이가 밤탱이 된 상황'에서 도쿄에 있는 신 명예회장을 직접 만났다. 신 명예회장은 나뿐 아니라 우리 단원들 모두 롯데 사무실로 초청했다. 신 명예회장은 내 주먹을 만지며 "일본 선수를 때려눕힌 손"이라고 말했다. 곁에 있던 일본인 임원들이 앞다퉈 내 손을 만져봤다. 신 명예회장은 롯데가 새겨진 빨간 봉투에 일본 돈 100만엔을 넣어 줬다. 당시 '개도 포니를 탄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오던, 한창 개발 중이던 서울 개포동 아파트를 살 수 있는 거금이었다.

홍수환이 1978년 2월 1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가사하라 유와의 세계복싱협회(WBA) 주니어페더급 1차 방어전에서 다운을 빼앗는 모습. 홍수환의 트렁크에 '롯데'라는 문구가 새겨져있다.

신 명예회장에게 신세를 진 건 그때뿐이 아니었다. 1977년 11월 '4전 5기 신화'로 불리며 세계챔피언에 올랐을 때도 롯데가 후원사였다. 후원사라는 개념조차 없을 때 롯데는 내게 도움을 많이 줬다. 돌이켜보면 그로부터 사랑을 흠뻑 받았다. 그와의 인연을 통해 8년 동안 롯데 신입 사원을 대상으로 강연하는 기회도 얻을 수 있었다.

와이셔츠 하나 팔기 어려운 게 비즈니스 세계라고 생각한다. 그는 가장 작은 것(껌)에서부터 시작해서 제일 큰 것(롯데월드타워)까지 이뤄낸 사람이다. 신 명예회장이 세상을 떠났다고 하니 섭섭함이 크다. 그는 산전수전을 다 겪은 사람이다. 복싱으로 따지면 신 명예회장은 4회전, 6회전짜리 경기는 물론 15회전까지 다 치러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