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 노환으로 별세한 신격호(99) 롯데그룹 명예회장은 맨손으로 시작해 글로벌 기업을 일군 우리나라 창업주 1세대의 전형으로 꼽힌다. 그가 제일 좋아하는 말은 '도전'이었다. 평소 직원들에게 "일하는 방식은 몰라도 되지만 열정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렇게 1948년 일본에서 창업한 롯데를 자산 115조원의 글로벌 기업으로 키우는 과정에서 신 명예회장이 직면했던 결정적 장면들을 돌아봤다.

①1968년: 제철소 꿈꾸던 껌 사업가

1942년 부산에서 일본 시모노세키로 향하는 관부연락선에 올라탄 스물한 살 청년 신격호는 6년 뒤 시작한 '풍선껌' 사업으로 성공했다. '조선인'이란 편견을 딛고 롯데를 일본 대표 식품 기업으로 일궜지만, 정작 일본 생활은 달콤하지 못했다. 신 명예회장은 훗날 인터뷰에서 "단신으로 일본에 건너가 피눈물 나는 고생 끝에 어느 정도 성공한 이후 조국을 위해 무엇이든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1951년부터 14년간 진행된 한일 회담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1965년 한일 협정 체결로 한일 양국이 수교(修交)하자, 모국에 투자할 기회가 성큼 찾아왔다. 마흔여섯의 '재일 기업인 신격호'는 서류 가방 하나를 들고 김포공항에 내렸다.

신 명예회장은 1967년 자본금 3000만원으로 서울 영등포에 롯데제과를 세웠다. 일본에서 그는 풍선껌 사업가였지만, 한국에선 중화학 공업에 도전하고 싶었다. 당초 박정희 정부가 신 명예회장에게 권유한 사업도 종합 제철소 건설이었다. 19일 닛케이신문에 따르면 신 명예회장은 1968년 후지제철(현 일본제철)의 나가노 시게오 사장을 찾아가 기술협력을 요청했다. 나가노 사장은 "엉뚱한 사람의 별난 생각이 좋다"며 화답했다.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이 1995년 8월 설계사 직원들과 롯데월드타워 설계회의를 하고 있다. 롯데월드타워는 '필생의 숙원'이었다. 신 명예회장은 23차례나 디자인을 바꾸는 등 롯데월드타워의 입지에서 설계·시공까지 직접 챙겼다.

롯데는 후지제철의 도움으로 제철소 사업 계획을 세우고, 설계 도면도 완성했다. 하지만 정부가 최종적으로 철강 사업을 국영화하기로 하면서 롯데 제철소 꿈은 좌절됐다. 신 명예회장은 설계 도면을 정부에 흔쾌히 넘겼다. 신 명예회장과 가까운 재계 관계자는 닛케이에 "당시 그의 억울한 표정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중후장대 사업을 하겠다는 그의 꿈은 1979년 공기업이었던 호남석유화학(현 롯데케미칼)을 인수하며 실현됐다.

②1979년:호텔, 무모한 도전 현실로

신 명예회장은 1970년 관광과 유통업으로 시야를 넓혔다. 그해 11월 롯데는 호텔 사업을 위한 특별조직 '비원프로젝트팀'을 구성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호텔 사업을 권했다. 롯데는 1973년 한국관광공사가 운영하던 반도호텔을 인수했다.

신 명예회장은 변변한 호텔도 없던 나라에 38층짜리 마천루를 올리겠다고 했다. 호텔 업계 전문가들은 "한국의 경제 상황을 고려하면 300실이 최대 규모이며, 하얏트·힐턴 같은 외국 브랜드를 들여와 운영하는 것이 낫다"고 조언했다. 하지만 신 명예회장은 "1000여실 규모 대형 호텔을 지어 롯데 독자 브랜드로 운영하겠다"고 했다.

주변에서 무모한 도전이라고 했지만, 롯데는 6년간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든 자금에 맞먹는 1억5000만달러를 쏟아부었다. 일본 롯데가 번 돈을 대거 호텔롯데 건립에 투자했다.

신 명예회장은 직접 해외 유명 호텔을 답사하고, 건물 설계와 인테리어를 꼼꼼히 확인했다. 롯데호텔에 대한 신 명예회장의 애정은 지극했다. 소공동 롯데호텔서울 개관 당시 문을 연 지하 1층 펍 '보비 런던'(2010년 폐점)의 접시·머그컵을 영국에서 직접 들여왔을 정도였다.

③1989년:밀어붙인 롯데월드

신격호 롯데 명예회장은 1978년 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우리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신 명예회장은 상권의 개념을 바꾼 기업인이었다. 사람이 많은 곳에 매장을 여는 대신, 사람이 찾아올 만한 콘텐츠로 상권을 만들었다. 롯데는 1981년 '1988 서울올림픽' 유치가 확정되자 롯데월드 사업을 구상했다. '롯데 50년사'에 따르면 롯데월드는 "우리나라는 일요일이 돼도 가족들이 함께 쉴 만한 곳이 없는데 이를 충족할 수 있는 시설이 무엇일까?"라는 신 명예회장의 물음에서 시작됐다.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당시 잠실은 도심에서 먼 외곽인 데다 주변이 황무지나 다름없어 비가 많이 오면 침수를 걱정해야 할 정도였다. 겨울에는 관광객 유치는 고사하고 시설 보존조차 어려울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신 명예회장은 롯데월드를 실내에 짓자는 아이디어를 내고 밀어붙였다. 사업비 6500억원을 들인 롯데월드는 1989년 문을 열었고, 세계 최대 규모 실내 테마파크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우려와 달리 롯데월드는 개관 27개월 만에 누적 입장객 1000만명을 돌파했다. 신 명예회장은 1995년 관광산업 분야에선 최초로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④2017년:마지막 꿈, 롯데월드타워

신 명예회장의 '마지막 꿈'은 롯데월드타워였다. 롯데월드타워는 2010년 11월 지상 123층으로 설계변경 허가를 받아 착공한 지 6년 만인 지난 2017년 4월 3일 탄생했다. 롯데월드타워 건설은 1987년부터 기획된 숙원 사업이었다. 신 명예회장은 대지를 매입하면서 "잠실에 초고층 빌딩을 짓겠다"고 했다. 아파트를 짓는 게 수익성이 훨씬 좋다는 의견이 많았지만, 신 명예회장은 "서울에 온 관광객들에게 고궁만 보여줄 순 없다. 우리도 뉴욕이나 파리와 어깨를 나란히 할 세계적 명소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며 롯데월드와 함께 세계 최고·최대 종합관광단지를 조성한다는 청사진을 그렸다.

롯데월드타워가 처음부터 123층으로 계획된 건 아니었다. 롯데는 1989년 11월 33층 규모의 호텔과 백화점, 문화 관광 홀 등을 건립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사업 계획서를 서울시에 제출했다. 하지만 이즈음 북한이 100층 규모의 고려호텔을 건립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계획을 바꿨다.

신 명예회장은 디자인을 23번이나 바꿔가며 롯데월드타워의 입지에서 설계·시공까지 직접 챙겼다. 건축 허가까지 24년이 걸리고 서울공항 비행 안전성 문제로 여론의 반대까지 심했던 롯데월드타워가 완공되기까지 4조2000억원이 투입됐다.

롯데월드타워가 개장한 지 한 달 만인 지난 2017년 5월 3일 신 명예회장은 휠체어를 탄 채 롯데월드타워 118층 전망대를 찾았다. 이미 쇠약한 모습이었지만 그는 "관람객이 얼마쯤 될 것 같냐"고 여러 차례 물었다.

신 명예회장은 한동안 49층의 주거 시설에서 지내기도 했다. 롯데월드타워 홍보관 벽면에는 신 명예회장을 포함해 롯데월드타워 건립에 참여한 임직원 8000여 명의 이름을 일일이 새긴 동판이 붙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