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소했던 '사회적 가치 경영', 기업 생존 조건으로 부상
'장애인 접근성' 고민하는 구글·'용수 재활용' SK하이닉스
사회적 기업 제품에 지갑 여는 2030 소비자 늘어난 영향

"사느냐 죽느냐, 이젠 사회적 가치 추구에 달려있습니다."

이윤 추구가 최우선 목적인 기업도 사회 구성원과 환경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사회적 가치 창출’이 기업 경영의 트렌드로 떠올랐다. ‘사회적 기업’ ‘기업시민’ 같은 개념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국내에서 주목받지 못했지만, 최근 주요 기업 경영진은 팔을 걷어붙이고 이 개념을 공부하고 나섰다. 경영학 교재에서나 언급됐던 개념이 책을 뚫고 나와 ‘실천학’으로 진화하고 있다.

◇ 소비자 변화에 기업들 "'사회적 가치' 창출해야 생존"
기업들이 배가 불러 허세 부린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사회적 가치에 대한 인식 수준이 높은 2030 밀레니얼 세대와 Z세대(1995년 이후 태어난 세대)가 소비의 주역으로 등장하면서, 기업이 과거처럼 경제적 가치만을 추구해서는 지속적인 성장이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예컨대 동물 실험을 하지 않는 화장품 회사의 제품만 구매하고, 시장가의 1.5배를 내더라도 신발 한 켤레를 구매하면 다른 한 켤레를 제3세계에 기부하는 기업의 제품을 사는 소비자가 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동물실험 반대 캠페인과 팜오일 사용 줄이기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영국 화장품 브랜드 러쉬.

말 그대로 ‘살기 위해’ 기업들은 사회적 책임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올 한해 동안 기업이 추구할 방향을 제시하는 신년사에서도 이 개념은 자주 언급됐다. "그룹이 생존하려면 사회적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사업모델을 새롭게 만들어야 합니다. 2020년대는 함께 성장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고, 행복을 나누지 않으면 신뢰받기 어렵습니다." 생존 방안으로 사회적 가치 추구를 모색하는 김정태 하나금융그룹 회장이 임직원에게 전한 신년 메시지다.

◇ '기업시민' 전도사 최태원 "과거 경제학 통하지 않는 시대"
생소했던 사회적 기업 개념을 실천의 영역으로 끄집어낸 선두 주자는 최태원 SK그룹 회장이다. '기업시민 전도사'라고도 불리는 최 회장은 6년째 참석하는 자리마다 사회적 가치 경영을 강조한다. 그 또한 사회적 가치 추구에 기업의 미래가 달려있다고 주장한다.

"솔직히 나도 사회적 가치를 만드는 게 어렵고 귀찮기도 하지만, 이 흐름은 거스를 수 없는 수준에 와 있다."

지난달 3일 서울 대치동 포스코센터의 행사장을 찾은 최 회장은 ‘기술 혁신 시대 기업시민의 역할’을 주제로 한 강연에서 이같이 말했다. 재계 총수로는 극히 드물게 다른 기업 행사장의 연사로 나선 최 회장은 약 한 시간 동안 포스코 임직원 500여명 앞에 서서 "이제는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기업이 돈을 번다"고 했다.

"고객 취향이 까다로워지면서 과거 경제학이 통하지 않는 시대가 왔습니다. 고객이 환경 파괴적인 기업 제품은 사지 않는다고 선언합니다. 우리는 분명히 가격이 싸면 잘 팔릴거라고 배웠는데, 이젠 싸다고만 해선 팔리지 않습니다. 고객이 변한겁니다."

그는 구글을 예로 들어 사회적 가치 경영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구글은 5월에 열린 연례 행사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장애인 접근성’만 얘기했는데, 왜 그랬을까. 구글이 이익 창출이 아닌 사회적 공헌을 최우선 가치로 둬서 그런 것은 아닐 거다. 거기엔 결국 돈 버는 전략이 있지 않겠나. 기업시민 되는 게 중요한 이유는 살기 위해서, 돈을 벌기 위해서다."

◇성과 평가에 '사회적 가치 창출' 추가도… 실천 기업 늘어
SK그룹은 계열사별 사회적 가치 창출 성과를 지표로 만들어 관리하면서 회계 장부에 경제적 가치뿐 아니라 사회적 가치를 함께 기입하고 있다. 고용, 납세 등 경제에 간접적으로 기여한 성과 등 사회적 가치라는 추상적인 값에 수혜집단이 얻은 편익의 가격을 추정해 반영하는 식이다.

이같은 흐름에 지난해 SK그룹이 고용한 장애인은 1년 새 60% 증가했다. SK하이닉스는 용수 재활용을 확대했고, SK이노베이션은 폐플라스틱 재활용 캠페인을 진행하는 등 친환경 경영 전략을 펴고 있다. 문성준 SK수펙스추구협의회 부장은 "사회적 가치 지표 측정이 아직 완벽하진 않지만, 해외 사회적 기업 등과 논의하며 개선해나가고 있다"며 "일반 기업을 상대로도 사회적 가치 성과를 측정해 보상하는 ‘사회 성과 인센티브’ 제도를 이어나갈 방침"이라고 했다.

사회적 책임을 실천하고 나선 기업은 점차 늘고 있다. 최정우 포스코 회장은 2018년 취임과 동시에 ‘기업시민’ 경영이념을 선포했고, 포스코는 지난달부터 사회적 친화 기업에 구매 우대 제도를 도입했다. 현대차그룹은 고용노동부와 협약을 맺고 2023년까지 사회적기업 150곳을 육성하고 1250명의 청년 일자리를 창출하기로 했다. 신한은행도 지난해 ‘성공 지원센터’를 열고 자영업자와 창업 준비생들에게 금융·경영·상권·창업 관련 상담과 외부 전문가를 통한 전문 컨설팅을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