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 서울 서대문 NH농협은행 본점 4층의 귀퉁이에 있는 5평 남짓한 작은 방. 이름표도 없는 방 한쪽 벽면을 가득 메운 모니터에 '연지선봇' '민연규봇' '박두희봇' 같은 제목이 붙은 화면들이 켜졌다 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봇'들은 스스로 문서를 열어 눈 깜짝할 사이에 숫자를 대조해 보거나 빈 공간에 숫자를 채워 넣는 등의 작업을 쉴 새 없이 계속하고 있었다.

서울 서대문 NH농협은행 본점에서 은행 직원들이 일선 지점에 배치된 '일하는 로봇'(RPA)들을 통합 관리하는 업무를 하고 있다.

이곳은 전국 농협은행 일선 지점 행원들의 '개인 비서' 역할을 하는 로봇들이 주어진 임무를 처리하는 방이다. '연지선봇'은 농협 용산지점 연지선 차장이 부리는 대출 심사 전문 로봇. 대출받은 사람들은 통상 1년에 한 번 대출 연장 심사를 받는데, 연지선봇은 대출 상품별로 채무자의 나이, 직장명, 연금 수급 정도 같은 것들을 대조해 3분 만에 심사를 끝낸다. 이 은행은 하루 평균 1600건의 대출 연장을 심사하는데 현재 96%를 연지선봇 같은 '로봇' 은행원들이 처리하고 있다. 단순 반복 작업은 로봇들에 맡기고, 은행원들은 전략·기획 업무 등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업무에 집중하는 것이다.

◇비용은 은행원 10%, 업무 처리량 4배

일하는 로봇인 RPA(Robotic Process Automation·로봇 프로세스 자동화) 도입이 은행권에서 확산되고 있다. RPA는 눈에 보이는 실물 로봇이 아니라 일종의 소프트웨어다. 사람이 정해준 규칙에 따라 방대한 자료를 조회하거나 비교·분석·입력하는 게 주특기다.

국내 금융권 RPA 확산의 선봉장은 농협은행이다. 농협은행은 2018년 개인 여신 자동 기한 연기와 휴·폐업 정보 조회 같은 업무에 은행권 최대 규모 RPA를 도입한 데 이어, 작년 말에는 총 40개 업무에 쓸 수 있는 로봇 개발을 완료했다. 과거엔 영업점에서 종일 매달려야 했던 기업 여신 본부 우대 금리 심사·승인 업무나 개인 카드 임시 한도 승인 검증·심사 같은 것들은 이제 로봇이 대부분 도맡아 처리한다. 월간 실적 보고서 작성처럼 과거에는 야근을 해야 겨우 끝낼 수 있었던 정기 업무도 이제 로봇에 맡기고 퇴근한 뒤 다음 날 출근길에 완성본을 점검할 수 있을 정도로 편해졌다.

부지런한 로봇 은행원들의 미덕은 단지 '속도'만이 아니다. 도저히 할 수 없었던 일을 가능하게 만들기도 한다. 과거에는 전국 50만 사업자의 휴·폐업 정보를 국세청 홈페이지에서 하나하나 검색하는 게 불가능하다 보니 은행원들이 몇 개 표본만 뽑아서 점검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로봇들 덕분에 전수조사가 가능하다. 주 52시간 적용도 받지 않고 밤샘 작업 지시에도 불평불만 없는 RPA 덕분이다. 여러 사람이 돌려 쓰는 '공유봇', 잠깐씩 활용하는 '인턴봇'도 있다.

농협은행 디지털전략부 김지혜 차장은 "은행원 한 명당 평균 연봉이 1억원이라고 할 때 로봇 1대에 들어가는 비용은 600만~800만원 수준"이라면서 "연봉은 10분의 1도 안 되는데 업무 처리량은 4배 이상"이라고 전했다. 농협은행은 RPA 도입으로 연간 약 20만 시간의 업무량 절감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농협은행은 불완전 판매 여부를 점검하는 로봇 개발을 곧 끝내고 실전 투입할 예정이다. DLF(파생결합펀드) 사태 때 고객 투자 성향 점수가 제대로 입력되지 않았거나, 점수와 맞지 않는 고위험 상품을 판매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만 점검하는 로봇이 도입되면 이런 불완전 판매는 원천 예방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미국선 은행원 120만명 일자리 잃을 것

신한·KEB하나·KB국민·IBK기업은행 등 국내 다른 은행들도 앞다퉈 RPA 도입에 열을 올리는 중이다. 업무 효율성과 정확도를 높이고 인건비도 절감하려는 이유다. 컨설팅사 액센추어는 RPA로 2022년까지 글로벌 은행 매출이 34% 증가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나 생산성 향상은 대량 실업 위기와 동전의 양면이다. 시장조사 업체 오토노머스리서치는 2030년까지 미국에서만 단순 업무를 담당하는 은행원 등 120만명이 RPA에 대체돼 일자리를 잃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시티그룹도 2018년 '미래의 은행' 보고서에서 AI(인공지능)와 RPA 등 자동화 기술이 향후 5년 내 고객 서비스 영역의 50% 이상을 대체할 것이라고 봤다.

로봇과 인간이 분업을 통해 공존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전우영 PWC컨설팅 디렉터는 "실수 없는 로봇이 방대한 데이터 확인 같은 단순 반복 업무를 대신해주고 사람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업무에 집중함으로써 전체 업무의 질이 높아진다는 점이 RPA 도입에 따른 궁극적인 기대 효과"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