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베이거스=박순찬 특파원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IT(정보기술) 전시회 'CES 2020'이 지난 10일(현지 시각) 막을 내렸다. CES는 소비자 가전 전시회(Consumer Electronics Show)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자동차, 선박, 중공업, 식품 등 업종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기업의 테크놀로지를 전시하는 '미래 전시회'로 거듭났다. 나흘간 17만여명이 전시회를 보기 위해 모였다. 2020년대 기술은 우리 삶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한국은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가.

①2020년대 우리가 살 미래 도시

이번 CES의 중요한 화두는 '스마트시티(Smart City)'였다. 테크기업들은 자율주행차, 에어택시(air taxi)와 같은 미래의 탈것을 넘어 도시 전체를 디자인하는 큰 그림을 그렸다. 향후 10년 내 우리 눈앞에 펼쳐질 도시의 모습이다.

일본 도요타가 제안한 '워븐 시티(woven city)'가 대표적이다. 전시장의 360도 원형 스크린에 도요타가 그리는 미래 도시가 펼쳐졌다. 하늘에는 에어택시와 택배 상자를 품은 드론이 날아다니고, 지상에선 자율주행 셔틀버스가 오갔다. 자율주행 화물차가 짐을 싣고 오자 일꾼 로봇들이 이를 실어 날랐다. 집 한쪽 벽면에서 방금 도착한 택배 상자를 꺼냈고, 거실에는 바퀴 넷 달린 심부름 로봇이 돌아다녔다. 도요타는 내년 초 일본 후지산 주변에 70만8200㎡ 규모로 이 같은 도시를 실제 만들기 시작한다. 현대자동차가 선보인 미래 도시도 전기 비행기에서 내려 곧바로 자율주행 셔틀버스로 갈아타는, 물 흐르듯 끊임없는 이동 서비스가 특징이다. 스마트시티에는 인공지능(AI)과 로봇, 드론, 5G(5세대) 이동통신과 같은 첨단 기술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관건은 차량 공유조차 막힌 한국의 도시에서 이런 실험이 가능하냐는 것이다.

②또 하나의 생활공간 된 자동차

자율주행차의 장점은 '인간에게 자유 시간을 준다'는 것이다. 올해 CES에서 자동차 기업들은 차량 성능, 외관보다 내부 디자인에 더 공을 들였다. 운전석에 앉아 최신 영화를 보고, 식사를 하고, 명상 음악을 들으며 휴식을 취하는 다양한 경험을 선보였다. 음성 명령을 내리거나, 손을 움직이는 등 차량과 소통하는 가장 편리한 방법을 찾는 모습도 보였다.

식물성 고기 업체 임파서블푸드가 6일(현지 시각)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선보인 ‘돼지고기 차슈버거’ 시식용 제품.

이는 자동차 업계의 경쟁자가 달라짐을 의미한다. 자율주행 시대에는 운전의 재미, 내연기관 성능보다 이동 간 어떤 경험을 주느냐가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 소니가 부품업체 보쉬, 마그나, 콘티넨털을 비롯해 IT 기업 엔비디아, 퀄컴과 손잡고 '비전S'라는 전기차를 깜짝 공개한 것도 이런 가능성을 보여준다. 세계적인 디자인 기업이 이전과는 전혀 접근 방식이 다른 '자율주행차의 혁신 디자인'을 내놓고, 글로벌 자동차 시장을 흔들 수 있다.

③확장현실(XR) 시대

점차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다. 지금까지 머리에 기기를 뒤집어쓰고 눈앞의 가상현실(VR), 증강현실(AR)을 즐겼다면, 이제는 직접 그 안으로 들어가는 단계다. 이를 확장현실(XR· Extended Reality)이라 부른다.

실감 나게 가상 세계를 느끼기 위한 슈트(suit), 장갑 등이 이번 전시에 여럿 공개됐다. 영국의 테슬라 슈트 같은 업체가 대표적이다. 손의 촉각, 몸에 전달되는 충격을 생생히 느낄 수 있다. 또 미세한 손놀림, 몸동작을 감지해 그대로 구현하고 심박수와 같은 생체신호도 읽어낸다. 예를 들어 가상현실에서 지구 반대편에 있는 친구와 하이파이브를 하면 그 마찰감이 손에 전해지는 식이다.

영국의 테슬라슈트가 ‘CES 2020’에서 선보인 장갑. 가상현실(VR) 기기를 머리에 쓰고 이 장갑을 끼면, 가상 공간의 촉감과 진동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또 손의 미세한 움직임까지 파악해 가상현실에서 그대로 구현하고 맥박과 같은 생체 신호를 읽는다.

페이스북은 최근 별도 장갑이나 조작기기(컨트롤러) 없이도 VR 기기에 달린 카메라가 손놀림을 정교하게 읽는 기술을 공개했고, 올초에는 'VR판 페이스북' 호라이즌을 선보인다. VR 기기를 뒤집어쓰면 가상의 마을에서 페북 친구들을 만나고, 세계 각지에서 온 미술 동호인들과 한자리에 앉아 함께 그림을 그릴 수 있다. 확장현실은 게임, 소셜미디어뿐만 아니라 직업교육, 재활치료 등 다양한 활용이 가능하다.

삼성전자가 올 CES에서 선보인 인공인간 '네온'이 주목받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마치 진짜 같은 가짜 인간이 가상 세계 곳곳에서 사람을 대신할 것이다.

④가짜 고기, 집에서 재배한 채소

삼성전자가 선보인 ‘식물 재배기’의 모습. 씨앗 패키지를 넣고 문을 닫으면 최적의 환경에서 채소가 자란다. 집에서 요리하다 곧바로 뜯어먹을 수 있다.

'먹고사는 문제'도 첨단 기술을 만나 큰 변화를 겪는다. 삼성전자, LG전자가 선보인 식물 재배기는 상추, 케일과 같은 채소를 집에서 키우는 가전이다. 씨앗 패키지를 넣고, 문을 닫으면 2~6주 새 채소가 자란다. 요리하다 곧바로 문 열고 풀을 뜯으면 된다. 최단 거리의 '팜 투 테이블(Farm to Table)'이다. 한국 스타트업 '엔씽'도 온도·영양 등이 완벽하게 통제된 컨테이너에서 고품질 농작물을 재배하는 '컨테이너 농장'으로 CES 혁신상을 받았다.

삼성, LG는 요리하는 AI 로봇팔을 선보였다. 이제 유명 레스토랑의 수백가지 레시피를 기억하고, 식재료가 떨어지면 알아서 주문하는 로봇 셰프가 외식을 대신한다. 실리콘밸리의 푸드테크 기업 임파서블푸드는 CES 전시장 야외에 부스를 차리고 콩, 코코넛 등으로 만든 가짜 고기 햄버거를 관람객에게 나눠줬다. 맛과 식감이 진짜 고기와 유사하다. 고기를 넘어 성게알과 같은 해산물도 가짜로 만드는 기업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더 건강하고, 저렴하고, 지속 가능한 생태계를 만들겠다는 취지다.

⑤스타트업의 숙제, 스토리텔링

CES 전시장 '유레카파크'에는 세계 46국에서 온 스타트업(초기 창업 기업) 1200여곳이 다양한 아이디어를 선보였다. '라 프렌치 테크(La French Tech)'라는 구호를 내건 프랑스를 필두로 일본, 스위스 등이 대규모 국가 부스를 차렸다. 한국은 코트라(KOTRA), 카이스트, 삼성전자 C랩, 서울시·경기도 등이 제각각 부스를 꾸렸다. '한국관 통합'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스토리텔링이었다.

가장 돋보인 것은 일본관이었다. 스타트업 1000여곳 중 유일하게 알쏭달쏭한 회사명 대신 제품·서비스를 쉽게 풀어쓴 간판을 큼지막하게 내걸었다. 예를 들면 '애견인을 위한 제품' '중소상인을 위한 간편한 AI 카메라'라고 쓰고, 회사명은 그 밑에 작게 넣은 것이다. 도떼기시장처럼 번잡한 공간에서 소비자에게 무엇이 중요한지 고민한 결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