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년 만에 컴백한 애플, 음성인식 비서 호출명인 '헤이 구글'로 거리를 물들인 구글, VR(가상현실) 기기 선보이는 페이스북….

7일(현지 시각)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개막하는 세계 최대 IT전시회 'CES(Consumer Electronics Show) 2020'은 미국 '테크 공룡'들이 주도할 전망이다. CES는 1967년 시작됐지만, 미국 실리콘밸리 테크 기업은 가전 전시회 정도로 여겨 외면해왔다. 2000년대 삼성이 주도할 때는 '삼성 전시회'로 보기도 했다.

하지만 CES는 지난 수년간 중국 기업의 기술 경연장이 된 데 이어 최근에는 AI(인공지능), 로봇, 사물인터넷(IoT), 자율주행은 물론 기술 진보에 따른 프라이버시(개인정보) 침해 문제까지 아우르는 미래 테크 전시장으로 변모했다. 가전 전시회와 무관했던 휴대전화(애플), 인터넷 검색(구글), SNS(페이스북), 유통 물류(아마존)가 일상생활 속으로 들어오고, 미래 기술과 융·복합화가 거대한 트렌드가 됐다. 콧대 높은 실리콘밸리 기업이 잇따라 CES 문을 두드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올해도 드론의 맹주 DJI, 중국 1위 로봇회사 유비테크 등 1000곳이 넘는 중국 기업이 CES로 몰려가지만 바이두·알리바바가 불참하는 등 중국 기업의 참가 열기는 매년 식고 있다. IT 업계에서는 "기술 안보를 둘러싸고 미국과 충돌해온 중국이 '테크 독립'을 외치며 자국에서 열리는 전시회에 화력을 집중하고 있다"며 "중국이 그만큼 자신감이 있다는 의미"라고 분석했다.

◇애플, 28년 만에 CES 참가

올해 CES에는 미국의 테크 공룡 'GAFA'(구글·아마존·페이스북·애플)가 모두 참석해 진보된 기술을 선보이고 각종 콘퍼런스에 연사로 나선다. 애플은 1992년 존 스컬리 전 최고경영자(CEO)의 기조연설 이후 28년 만에 CES에 공식 참석한다. 애플은 그동안 CES에서 비공식적으로 기술 트렌드를 살피고 부품·기술 업체와 관계를 맺어오는 데 그쳤다. 스마트 홈킷과 AI 비서(시리) 기술이 적용된 가전을 공개할 예정이다. 제인 호바스 글로벌 프라이버시 담당 임원이 라운드테이블 콘퍼런스에 참가해 페이스북·P&G 등 주요 글로벌 기업과 '소비자들은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주제로 프라이버시 강화 방안을 논의할 예정이다. IT 업계에서는 애플이 소비자 보호 관련 정책이나 새로운 메시지를 내놓을 것을 기대하고 있다.

구글과 아마존은 음성인식 비서인 구글 어시스턴트와 알렉사로 영향력을 확대할 계획이다. 구글 어시스턴트와 아마존 알렉사는 거의 모든 전자 기기에 탑재되기 때문에 그동안 CES의 숨은 주인공으로 꼽혀왔다. 구글은 라스베이거스 곳곳을 음성인식 비서 호출명인 '헤이 구글'이라는 문구로 도배하고, 이전보다 진화한 구글 어시스턴트를 선보인다. 아마존도 알렉사를 활용한 스마트홈을 전시하고, 자동차 업체가 모여 있는 노스홀에 전시장을 꾸려 자동차용 음성인식 시스템을 선보인다.

페이스북은 마케팅, 프라이버시 정책을 총괄하는 주요 임원이 다양한 주제의 콘퍼런스 연사로 나선다. 또 행사장 곳곳에서 성능을 개선한 비디오 채팅 단말기와 자회사 오큘러스의 VR(가상현실) 기기를 시연한다. 6일(현지 시각)에는 '유튜브, 트위터, 인스타그램, 스냅챗 그리고 페이스북의 힘'을 주제로 공식 콘퍼런스를 진행한다.

◇화웨이, 전시장 37% 줄여

중국 IT 기업은 최근 수년간 첨단 기술을 선보이며 CES를 사실상 점령했다. 2018년에는 1551개 중국 기업이 전체 3분의 1을 차지했다. 중국 최대 인터넷 기업 바이두는 대규모 콘퍼런스인 '바이두 월드'를 열고 첨단 기술을 세계에 과시했다. 바이두의 추리 부회장은 마이크로소프트, 엔비디아, 퀄컴 등 글로벌 테크 기업 임원을 자신의 무대 옆자리에 일렬로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작년부터 중국 테크 기업은 CES에서 발을 빼고 있다. 2019년 1211개로 참가 기업 수가 줄더니 올해는 2일 기준으로 1098개가 등록을 마친 상태다. 중국 대표 테크 기업인 화웨이는 올해 전시장 크기(518㎡)를 작년보다 37%가량 줄였다. 가장 큰 전시장을 차리는 삼성전자(3363㎡)의 15% 수준이다. 바이두도 CES 대신 베이징에서 승객을 태운 채 자율주행차를 운행할 수 있는 면허를 취득하고 테스트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작년까지 매년 CES에 참여했던 알리바바도 올해는 빠졌다. 미·중 무역 분쟁으로 타격을 입고, 미국과 거래가 원만하지 않은 중국 기업이 CES 발길을 줄이는 것이다. 국내 전자업체 한 임원은 "CES 부스는 한 번 규모를 줄이면 다시 늘리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다"며 "CES를 점령했던 중국이 점차 사라지는 것"이라고 했다.

업계에서는 중국 기업이 '테크 자립'을 가속화하기 위해 미국(CES)과 유럽(IFA) 등에서 열리는 해외 IT 전시회 참가 규모를 줄이는 대신 자국 전시회에 집중한다고 분석한다. 중국은 'CES아시아' 'MWC 상하이' 등 자국에서 열리는 전시회 규모는 매년 키우고 있다. 작년 8월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국제 게임전시회 '차이나조이'에는 35만4000여 명의 관람객이 몰렸다. 작년 6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게임쇼 'E3' 관람객(6만6100명)의 다섯 배다.

정구민 국민대 전자공학부 교수는 "미·중 무역 분쟁으로 사업에 타격을 입은 중국 업체가 CES 참가를 자제하고 있다"며 "중국 테크 기업의 위세가 주춤한 사이 올해 CES에서는 미국 실리콘밸리 기업의 역할이 더욱 두드러질 것"이라고 말했다.